글_박승억(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는 말이 있다. 사정이 급할 때는 뒷일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의 힘을 빌려야 할 때 그 도움의 대가로 지키기 어려운 일도 쉽게 약속해 버리곤 한다. 하지만 일단 급한 불을 끄고 나면 생각이 바뀐다. 내주기로 약속한 것은 커 보이고, 상대의 도움은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별것 아닌 일을 해 놓고 너무 큰 것을 요구하는 상대가 도둑 심보를 가진 것만 같다. 어떻게든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어 약속을 뭉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약속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은 화를 부르기 쉽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의 말은 더욱 무거워야 한다. 그런 마음을 경계하게 해 주는 옛이야기가 독일의 하멜른 지방에서 전해지는 ‘쥐잡이 이야기’다.
1284년 하멜른의 거리에는 괴상한 차림의 사내가 나타났다. 알록달록한 옷차림새가 마치 광대처럼 보였는데, 그는 자신을 쥐잡이라고 소개했다. 마침 하멜른에는 쥐들이 난리를 쳐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 쥐잡이는 돈을 준다면 자신이 쥐 문제를 해결해주겠노라고 공언했다. 그가 요구한 돈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시민들의 불만과 원성에 시달리던 하멜른의 시장은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장에게는 ‘설마’하는 의심의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런 약속을 손에 쥐자 알록달록 쥐잡이는 주머니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술이라도 부린듯이 동네 곳곳에 숨어 있던 쥐들이 피리 소리에 이끌려 쥐잡이 근처로 모여들었다. 쥐잡이는 그렇게 쥐들을 모아 도시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고 쥐들은 쥐잡이를 따라가는 긴 행렬을 이루었다. 그 모습이 사뭇 장관이었다. 마침내 쥐들을 이끌고 베저 강변에 이르자, 쥐잡이는 옷자락을 걷어 올린 뒤 강물 속으로 들어 갔다. 쥐들 역시 알록달록 쥐잡이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가 모조리 빠져 죽었다. 그렇게 하멜른의 골치 아픈 쥐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멜른의 사람들은 귀찮은 쥐에서 해방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쥐를 몰아낸 일이 기특하기는 하지만 그깟 피리 부는 재주의 값어치로 치러야 할 돈이 아까웠다. 시장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온갖 핑계를 만들어 쥐잡이에게 돈을 주지 않으려 했다. 결국 쥐잡이는 몹시 화를 내고 하멜른을 떠났다. 얼마 뒤 성 요한과 바울로 축제일인 6월 26일 하멜른에 바로 그 쥐잡이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머리에는 붉은색의 괴상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그때처럼 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쥐가 아니라 네 살 넘은 아이들이 무엇엔가 홀린 듯이 그 쥐잡이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들을 이끌고 도시를 벗어나더니 산으로 가서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아이들도 사라졌다. 마침 그 무리에서 뒤처지는 바람에 따라가지 못한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 사정을 말했다. 집집마다 부모들이 달려 나와 슬퍼하면서 아이들을 찾아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사라진 아이의 수는 무려 130여 명에 달했다.
독일 북부 지방의 소도시인 하멜른을 세계적인 명소가 되게 만든 그림 형제는 이 쥐잡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라고 전한다. 그래서 이 미스터리한 실종 사건을 둘러 싸고 많은 해석이 오간다. 쥐는 당시 유럽에서 커다란 공포를 불러일으켰던 페스트를 상징한다는 해석부터 그렇게 사라진 아이들은 소년 십자군 원정대를 따라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미스터리를 풀기 위한 다양한 가설들이 이야기에 흥미를 더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지 우리의 추리 본능을 자극하는 것만이 아니라 약속을 가벼이 여겼을 때 받을 수 있는 대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필요한 것을 상대에게 얻어 내기 위해 공수표를 내밀었다가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삶의 교훈을 전하려는 옛이야기에는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다. 약속의 무거움을 아는 것, 그것은 한 개인의 품성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문화이기도 하다. 흔히 신뢰를 사회적 자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회가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더 높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사람들과 누가 거래하고 싶겠는가.
사람들이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약속을 어기는 것은 다시는 그 상대방을 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마치 팬데믹처럼 퍼져나가서 모든 사람이 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 보자. 그때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런 세상에서는 모두가 패자가 된다.
우리말에 얌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 공동체에서 얌체가 득을 보는 경우는 그 얌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신의를 지키고 선량할 때다. 하지만 얌체가 이득을 보았다는 것이 알려져서 다른 사람들도 얌체가 된다면, 결국에는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된다. 우리의 전통 사회가 얌체를 경계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