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박홍규(前 한전KPS 원자력연수원장)
다음 사례가 어딘가 익숙하다면 조직은 병들어 가고 있다는 신호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미 중앙정보국 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에서 적국의 조직을 와해시키는 스파이 지침으로 비밀 소책자(손쉬운 방해공작: 실전 매뉴얼)를 배포 했다. 이른바 ‘사보타주(태업) 현장 매뉴얼’인데 적국의 조직·사회를 망가뜨리고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행동지침이다. 어떻게 하면 적국에 침투한 스파이가 적국 조직의 생산성을 떨어뜨려 연합군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수록하였다.
특히 이 매뉴얼은 ‘적발될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도 조직을 망칠 수 있는 간단한 행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본래 기밀문서였던 이 책자는 2008년 기밀문서에서 해제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고, 매뉴얼의 지침들이 78년이 지났음에도 현재의 기업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만큼 합법적이고 정당해 보이는 전략들이다. 평범해 보이는 지침 같지만 무심코 넘어가는 사소한 행동들이 누적되어 조직에 깊숙이 침투하여 조직에 균열을 내고,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불만을 키워 결국엔 조직을 와해시키는 전략·전술서와 다름없다. 매뉴얼에서 제시된 전략은 이렇다.
1. 모든 것을 ‘체계’에 따르도록 요구한다. 빠른 의사결정을 위한 지름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침, 상사의 방침과 지시, 비합리적인 규칙 등 상황에 맞지 않는 비효율적인 절차일지라도 따르게끔 함으로써 사람들이 따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조직을 병들게 한다. 이것은 업무의 효율성을 떨어뜨려 위기에 닥쳤을 때 유연한 대처를 어렵게 만든다.
2. 지나치게 많이, 자주 말을 하라.
장황한 일화와 개인적인 경험을 덧붙임으로써 토론이 오랫동안 지연되거나 본론에서 벗어나게 한다. 결국, 참가자 모두가 다음 업무 수행에 조금씩 차질을 겪을 수 있으며 혼란스럽고 초조해지거나 이해력이 떨어져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조직의 어디에서든 회의와 대화의 진행에 방해가 되며 시간을 낭비한다. 조직의 전반적인 효율성은 떨어지고 의사결정 과정이 방해를 받으며 분열을 초래할 수 있다.
3. ‘추가 연구와 숙고’를 위해 가능한 모든 문제를 위원회에 회부하라. 위원회는 가능한 많이 만들어라.
위원회(또는 전담반) 활동을 통해 자기 책임을 분산시키고 조직의 인적·물적 자원을 낭비하게 만든다. 담당자가 고민하여 해결할 사안도 별도 조직을 만들어 추진하는 것은 자기책임을 전가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4. 관련 없는 사항을 가능한 한 자주 언급하라.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기 때문에 실질적인 피해를 입힌다. 논점을 흐려 놓음으로써 불필요한 긴장이 발생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악화된다.
5. 대화 내용, 회의록, 결의안의 정확한 단어를 갖고 실랑이를 벌여라.
좋은 아이디어나 참신한 해결책이 제시되면 단어사용에 시비를 걸어 지체시킨다. 작은 시간 낭비가 모여 막대한 시간과 조직의 에너지 낭비로 이어지게 만든다.
6. 결정된 사안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라.
결정의 번복을 통해 시간을 낭비하고 초점을 잃게 만든다. 결정된 사안이 번복되면 자원의 낭비를 초래함은 물론 부수적으로 파급되는 피해가 커서 지금 피해를 입히고 나중에 더욱큰 피해를 입히는 전략으로 통한다.
7. ‘주의’할 것을 장려하라.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훗날 곤란 하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 있으므로 서두르지 말고 ‘합리적’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하라.
조직에 스며든 신중한 사고방식은 지나치게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모두의 행동을 느리게 만든다. 신속한 결정이 필요한 시점에 발목을 잡는 일이다.
8. 모든 결정의 타당성에 의문을 표하라. 해당 조치를 취할 권한이 조직에 있는지, 이 조치가 고위층의 정책과 상반되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하라.
의사결정을 지연시키는 방법으로 효과적인 결정을 내리는 능력에 제동을 걸어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상사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단으로 해결해도 되는지 끊임없이 지적하여 조직 내부에 불안감을 조성한다. 의사결정권자의 권한에 의문을 제기하여 모든 결정에 의문을 품도록 부추기는 전략이다.
평범해 보이고 사소하게 보여지는 8가지 전략은 조직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것이 핵심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바람직한 행동으로 비춰진다. 그렇기에 천천히 조직에 균열을 내고,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불만을 키워 조직을 와해시키는 것이다. 조직 내부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경계해야 할 일이다. CIA의 지침을 반대로 살펴보고 해결방안을 모색해 본다면 조직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고ㅜ건강한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다.
올해는 사창립 38주년이다. 사람의 나이로는 중년을 바라보는 MZ세대(24~39세)에 속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38년 동안 줄기차게 앞을 보며 내달려 왔다면 이제는 조직의 내실화를 위한 재정비가 필요하다. 시대에 뒤처진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제도와 관행은 없는지, 현실성이 무뎌진 규정은 없는지 살펴보자. 개구리가 움츠리는 것은 멀리 뛰기 위함이다. 이것이 자기발전과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한 템포 늦춰 ‘자기점검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