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박승억(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
요즘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바로 ‘위기’다. 위기라는 말은 사람을 조급하게 만들고, 조급함은 이내 절박함을 낳는다. 그리고 절박할 때는 대개 선택의 기로에 내몰리기 마련이다. 그럴 때일수록 슬기롭게 보살펴야 할 것들이 있다. 그중 으뜸은 바로 각자의 영혼이다. 안타깝게도 ‘영끌’이라는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위기의 순간에는 영혼이라도 거래의 몫으로 던지고 싶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의 주인공을 통해 이런 우를 범하지 말도록 하자.
아주 오래전, 프랑스의 서쪽 땅, 브르타뉴의 한 가난한 어부 집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어부는 아이를 ‘장’이라고 불렀다. 장은 가정형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뱃사람 일을 거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장은 성실했고 똑똑했다. 장이 타는 배의 선주는 이내 장의 사람됨을 알아보았고 장이 어른이 되자 외항선의 선장 일도 맡겼다.
장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서 여러 항해와 무역을 성공시켰다. 덕분에 선주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 사이 장은 선주의 외동딸, 자네트와 사랑에 빠졌다. 선주는 장을 아꼈지만, 자기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는 딸 자네트를 바다를 떠돌며 살아야 하는 장과 결혼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선주는 장에게 자신처럼 부자 선주가 되어 더는 배를 타지 않아도 될 정도가 아니라면 결혼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은 크게 실망했지만, 자네트는 차분히 기다리면서 때를 보자고 장을 위로했다. 어느 날 제법 큰 거래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장은 바다 한가운데서 선원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 뱃사람이라면 황금섬에 대한 이야기를 알 것이요. 만약 여러분들이 황금섬을 찾는 일에 나와 함께 한다면, 나는 그 황금을 여러분들과 똑같이 나눌 것이오. 비록 전설의 그 섬을 찾는 여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함께 힘을 모으면 가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선원들은 장을 따르기로 하고 함께 모험에 나섰다. 하지만 남쪽 바다 곳곳을 뒤져보아도 황금섬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열두 달이 지났을 때, 먹을 것은 떨어져 가고, 배는 곳곳이 망가졌다. 장은 선원들에게 마지막 한 달을 간청했고, 그렇게 열세 번째 달마저 허망하게 지나가 버렸다. 선원들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장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장은 어두운 바다를 향해 ‘황금섬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내놓겠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악마가 나타났다. 겁에 질린 장을 향해 악마는 “황금섬을 찾게 해주지. 그 섬은 내 소유니 말야. 대신 네 영혼을 내게 주어야 한다.” 그러면서 악마는 장에게 계약서에 피로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장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장은 악마에게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황금을 가지고 무사히 귀향하게 해준다면, 그 서류에 피로 서명하기로 약속하였다. 악마는 자신만의 재능으로 그 낡은 배를 보름 만에 고향 땅에 이르게 해주었다.
장을 손꼽아 기다리던 자네트는 장의 배가 황금을 가득 싣고 돌아오자 너무나 감사하고 반가웠다. 그러나 이내 초췌한 장의 모습과 그의 뒤에 서 있는 창백하고 붉은 눈의 사람을 보고, 뭔가 사정이 있음을 알았다. 악마는 자네트 앞에서 장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자, 이제 나는 약속을 지켰네. 이제는 자네가 피의 약속을 해야만 해.” 장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자네트는 눈을 반짝이며 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약속은 지켜야죠.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존경하기 어려울 거예요.” 자네트의 말에 놀란 장이 악마의 서류를 받아들었을 때, 자네트가 악마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거죠?” 악마는 자신이 장의 배를 타고 왔다고 대답하자, 자네트는 그 배가 아버지의 배이므로, 뱃삯을 받아야겠다고 요구했다.
악마는 자네트를 바라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무 것이나 요구하렴. 무엇이든 줄테니...” 그러자 자네트는 장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빼앗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종이 하나면 돼요.” 자네트는 그 서류를 악마의 눈앞에서 찢어 버렸다. 악마는 너무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저주의 말을 남겼다. “오늘은 내가 졌다. 하지만 장, 네가 다시 배를 타고 바다에 나온다면 바로 그날로 나는 너를 데려갈 것이다.” 장과 자네트는 다시는 배를 타지 않기로 결심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성실했던 장이 자신의 영혼까지 걸어야 하는 선택에 내몰리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황금섬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다. 그 욕망은 자네트와 결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때를 기다려보자는 자네트의 말에도 장은 조급했다. 똑똑한 장이었지만 그 조급함이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그 결과 영혼까지 걸어야만 하는 선택에 내몰렸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끝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네트의 슬기가 보여준 것처럼 최악의 상황에서도 길은 있다. 장의 첫 번째 선택에서 조급함이 문제였던 것처럼, 실패를 확인했을 때도 조급해서는 안 된다. 그 조급함은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여유를 빼앗고 지레 포기하게 만든다.
오늘날 사회가 복잡해졌다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세상이 내 예상처럼 굴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 복잡한 주식 시장이 말해주듯 세상일의 진행을 예측하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반면, 그 복잡한 세상의 또 다른 의미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길이 오직 하나만 있지는 않다는 것, 어딘가에는 우회 경로가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고 해서 목표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조금 늦어지고, 좀 더 고되고 힘들어질지언정 길은 있다. 선택을 해야 할 때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단 한 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승부를 보기 위해 영혼까지 내건 장의 조급함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