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ERGY

한 줄 마음산책

하루의 기록이
역사를 낳는다


일이라는 것은 가까우면 자세하고, 조금 멀어지면 헛갈리고, 아주 멀어지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매일 그것을 기록한다면 가까운 것은 더욱 상세하고, 조금 먼 일은 헛갈리지 않으며, 아주 먼 일이라 해도 잊지 않는다.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일을 기록해 놓으면 따라 행하기에 좋고,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 해도 기록 덕분에 조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일기란 것은 이 한 몸의 역사다.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랴?
- 유만주(兪晩柱)의 일기, 흠영(欽英)의 서문에서

글_박홍규(前 한전KPS 원자력연수원장)

하루의 기록은 나를 돌아보는 것

새해에는 무엇이든지 첫 장으로 시작된다. 달력의 표지를 뜯어내고 업무수첩의 첫 장을 넘기며 신년업무의 첫 줄은 위로부터의 지시, 전달사항으로 빼곡해진다. 자신의 감정, 느낌의 서술보다는 기계적인 기록이 일상화된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더욱이 시간만 허락되면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들어 내면의 소리보다는 밖의 소식에 민감해진다.

스마트폰 세상에 갇혀 하루라도 스마트폰이 없으면 소외 받고 세상과 단절된 고립감에 불안해진다. 깊은 사색보다는 손끝의 검색이 주류가 된 디지털 세상을 살고있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롯이 자신과 마주하는 자기 성찰의 기록을 남기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습관이 되지 않는 한 점점 어려운 일이다.

유만주(兪晩柱)는 달랐다. 그의 자호(自號)이기도 한 ‘흠영’(欽英: ‘꽃송이와 같은 인간의 아름다운 정신을 흠모한다’는 뜻)은 조선 후기의 문인 유만주가 21세 때인 1775년 1월 1일부터 34세의 나이에 세상을 뜰 때까지 13년간 쓴 일기이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거자(擧子)로서 지금으로 치자면 만년 고시준비생, 취준생쯤 될까. 양반이면서 무직자였던 그는 소소한 일상과 생각의 기록은 물론, 나라 안팎의 모든 일과 당시의 생활을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일기의 서문에서 일기를 쓰는 이유를 “이 한 몸의 역사이기에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꾸준히 하루의 일상을 기록한 유만주의 일기는 개인의 사적 기록이면서 동시에 18세기 서울 사대부의 일상과 조선 사회의 여러 모습들이 소상하게 담겨있어 조선 후기 문학사와 사상사, 풍속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우리들에게 일기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의 숙제처럼 선생님께 하루를 확인받는 의식으로 남아 있다.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 자기만의 기록임에도 말이다.

세상은 바뀌어 온라인 사회관계의 형성에 중점을 둔 트위터, 페이스북과 같은 개인 커뮤니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s/Sites, SNS)를 통해 개인의 일상과 의견을 공유·소통하는 것이 사회적인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모든 것이 휴대폰에 집약된 세상에 살고 있는 ‘휴대폰 노마드족’에게는 문서로 일상의 기록을 남기는 일은 쉽지 않다. 스마트 기기를 이용하여 일상의 모든 것을 기록·관리하는 '라이프 로깅(Life-Logging)'을 통해 생활은 편해지고 있지만, 자신만이 느꼈던 경험과 감정을 기록하고 분석해주는 서비스는 없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맡은 업무의 추진 경과와 결말에 이르는 단계마다 자신의 느낌과 숨겨진 일들을 소소하게 기록하여 남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전산화된 문서들은 그 당시 담당자의 고민과 현장의 숨결이 느껴지지 못한다. 어렵게 추진된 업무일수록 그 속에 담긴 극복과정과 참고자료, 노하우는 정말 귀한 자료가 된다.

경험의 기록이 습관화되지 않을수록 프로젝트는 담당자 한 사람의 경험으로 묻혀지기 십상이다. 인사이동이 생기면 책상은 깨끗이 치워지고 선반에는 박제화된 서류철만 신임담당자를 반긴다. 후임자는 과거서류를 찾고 처음부터 비슷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떠날 때는 숱한 경험과 에피소드는 함께 사라진다. 조직 내부의 지식으로 축적되지 않는 반복적인 일상이 관습이 되어버렸다. 내가 떠나면 모든 것이 ‘로그아웃’되는 세상이다.

선배로서의 우선 덕목은 기록의 대물림

정비업무는 대부분 경험을 바탕으로 한 기술축적이 생명이다. 몇 해 전에 개인의 정비기록을 전산화시켰던 때가 있었다.

그동안 문서시스템에 보관된 경험과 지식의 활용도는 얼마나 될까. 문제는 지식축적보다는 검색된 지식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느냐의 여부이다. 실무에 도움되지 않는 피상적인 지식들이라면 아무리 많은 정보가 공유되더라도 외면받게 된다.

새해에는 기록하는 습관이 들도록 도전해 보자. 비록 자기 경험이 함축됐다고는 하지만 ‘라떼’라는 말보다는 기록을 남겨 대물림함으로써 후배들에게 생각의 지평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보는 것은 어떠한가. 업무 중에 얻게 된 경험과 노하우는 업무지침서, 편람, 가이드북 형식의 실무지침서를 만들어 남겨주자. 작업을 수행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으며, 참고한 책은 무엇이며, 작업과정에서 일어난 갈등과 해결책은 무엇인가를 남겨준다면 그만큼 후배들의 시행착오는 줄어들 것이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고 추가해 나갈 것이다. 기록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말이다. 기억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되고 흩어진 나를 바로 세우는 자기성찰을 위하여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직장내에서의 경험의 기록이 축적되어 지식이 되고, 조직 구성원들에게 공유될 때 조직은 성장하게 된다. 도전하는 것도 습관이고 포기하는 것도 습관이다. 습관이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삶을 결정짓는다고 하지 않는가. 업무경험과 노하우의 대물림은 직장인이라면 너와 나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의무이다.

유만주는 말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무엇도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서 기억에 남는 이가 되려고만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