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박승억(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뜻이다. 반면, ‘눈뜬장님’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눈이 온전하게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일 또한 중요해 보인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달리 보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삐딱하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또 때로는 창의적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사물의 보임새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같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어떤 맥락과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때가 있다. 프레임이라는 말이 그런 사정을 대변한다. 판소리와 소설로, 또 학생들의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그래서 한국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아는 심청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자.
심청전은 그 판본에 따라 인물에 대한 성격묘사가 조금씩 다르지만, 그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가난한 유생에 시력까지 잃은 심학규는 나이가 지긋해서야 곽씨 부인에게서 딸을 얻는다. 이름을 ‘청’이라 하였다. 곽씨 부인은 청을 낳자마자 세상을 뜨고, 생계를 제대로 꾸릴 형편이 안 되었던 심학규는 젖동냥으로 정성을 다해 청을 기른다. 청은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 정성을 다해 아버지를 봉양한다. 어느 날 다른 집에 일을 나간 청이 돌아오지 않자 청을 찾으러 나선 심학규는 앞이 보이지 않아 개울에 빠지고 말았다. 지나던 스님이 그를 구해주고 난 뒤, 공양미 삼백 석으로 부처님께 정성을 다해 빌면 눈을 뜰 수 있으리라 말한다. 심학규는 앞뒤 재지 않고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겠노라고 약속하고 말았다. 덜컥 약속은 했지만, 그 형편에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부처님께 한 약속인지라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마침내 청이 그 사정을 알았다. 때마침 청은 남경 상인들이 많은 돈으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인들은 파도가 험해 뱃사람들을 위협하는 인당수의 용왕에게 바칠 아녀자를 구하고 있었다. 청은 전전긍긍하던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다. 삼백 석의 공양미를 절에 시주하고 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청이 승상 집 양녀로 가는 줄만 알았던 심학규는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되돌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청은 하늘의 도움을 받아 용궁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도 뵙고 용왕의 배려로 커다란 꽃에 담긴 채 이승으로 돌아온다. 너무나 큰 꽃을 발견한 뱃사람들이 그 꽃을 기이하게 여겨 황제에게 바쳤다. 청이 그 꽃에서 나오자 황제는 청과 결혼하였다. 청은 황제에게 부탁하여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큰 잔치를 열었고, 우여곡절 끝에 그 잔치에 참석한 심학규를 만난다. 청이 심학규를 알아보자, 심학규는 꿈에 그리던 딸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에 눈을 번쩍 뜨고, 이후 부녀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심청의 이야기는 눈먼 아비를 위한 효심 가득한 딸의 이야기다. 오늘날의 감각에서 보면 심
청의 효는 좀 낯설다. 자신의 희생으로 아비가 눈을 뜬다 한들 그토록 딸을 사랑했던 아비가 행복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이야기의 줄기인 심청의 고운 마음과 효심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하다. 다만 심청의 이야기를 그 메시지에만 주목하면 다른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보통 중심 메시지는 이야기를 해석하게 하는 프레임이자 규범처럼 작동한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것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심청의 이야기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딸의 지극한 효심이라는 메시지를 잠시 괄호 속에 묶어 놓으면 다른 이야기들이 보인다. 바다를 오가는 상인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가난한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그렇다. 조직의 안정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반복되는 일이다. 그 희생은 언제나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몫이다.
마치 공정한 절차라도 거치듯이 자원자를 구하지만, 자원자는 대개 절박한 상황에 내몰린 자다. 또 심청의 고운 마음씨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감추기도 한다.
우리의 눈은 초점을 맞추어야 제대로 본다. 그렇게 초점을 맞추어 뭔가에 주의를 집중하면, 그 주변은 잘 안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주변이 없으면, 초점도 맞춰지지 않는다. 조연이 없으면 주인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선을 옮기는 것에 따라 중심과 주변이 변화하고 그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시선의 자유다. 시선의 자유는 생각도 새롭게 한다. 누군가와 잘 통하지 않을 때, 생각해 볼 일이다.
다르게 보고자 한다면 주변의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프레임을 바꿔야 보이기 시작한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우리의 프레임을 결정하므로 그 당연한 것들을 잠시 괄호에 묶어 놓을 때 비로소 말을 걸어오는 것들이 생긴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 말을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태양이 도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혁명적이었던 이유는 사람들의 눈이 뻔히 보고 있는 것을 뒤집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