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박홍규(前 한전KPS 원자력연수원장)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필요 없는 의무감으로 현재가 비참해져서는 안 된다.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가 흔들거려서는 안 된다.
자신의 목표를 확고하게 하고, 그 목적지를 향해 순간순간의 발걸음을 뚜벅뚜벅 옮길 수 있을 때 현재를 즐길 수 있게 된다.
- 아프니까 청춘이다(김난도) 중에서
가을이다. 추억의 한 페이지를 넘기듯 짙은 녹음의 계절에서 화려한 버림의 계절로 자연은 물들어 가고 있다. 계절마다 자기만의 향과 화사함을 뽐내며 풍성한 그늘을 내주었던 나무는 자신이 피고 지는 때를 알고 있기에 가을의 ‘비움’을 통해 새로운 내일의 ‘채움’을 준비한다. 자연이 그랬듯이 우리에게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간 -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언제일까?
직장생활을 하면서 경영진 가까이에서 그분들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회사 임원들의 생활은 화려하고 폼나는 자리로만 여겼겠지만, 항상 깊은 고민과 어떻게 회사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궁리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인이 되신 세 분의 사장님들과의 만남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 주었다. 현장 직원들에 대해 각별히 애정이 깊으셨고, 기업문화 창달을 위한 ‘SYATT2000운동’을 전개하신 서석천 사장님(5대), 민영화 논의의 중심에서 정신운동 추진을 발의하여 ‘한마음운동’을 시행하신 이원(6대) 사장님의 비서생활을 통해 윗분들의 고충을 읽어 볼 수 있었다.
또한 선진화추진실을 통해 가까이 모셨던 커피를 즐기신 권오형 사장님(10대)은 ‘정도경영’과 윤리경영 브랜드인 ‘Crystal KPS’를 제정하셨으나 재임 중 과로로 별세하셨다. 회사경영에 늘 고민이 깊으셨던 분들의 곁에서 실무자 입장에서 윗분들에게 현장의 소리를 전달하고 고민을 공감하며 해결방안을 찾던 때였다. 오늘날 우리 회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진정으로 회사를 아끼셨던 선배님들의 잠 못 이루는 밤의 결실이라 믿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화려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윗분을 모시는 자리는 늘 긴장이 뒤따르고, 말과 행동의 올곧음이 요구되는 힘든 ‘자기관리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고인이 되신 사장님들의 노고에 깊은 존경의 마음을 올린다.
사내 현실을 들여다보고 분석·진단을 통한 제도개선이 나의 회사 경력의 대부분이다. 조직의 현상을 들여다보며 ‘이게 왜 이렇지(Why)? 그럼 어떤 해결 방법이 있을까(How)!’가 머릿속에 기본공식으로 각인되었던 청춘의 시간이었다. 자료를 찾기 위하여 사내도서실은 수시 방문처가 되었고, 미비한 자료는 세미나를 참석하거나 있는 곳을 찾아다녔고, 책을 구해 탐닉하며 개선 착안점을 끄집어내야 했다. 잘된 사례를 찾아 대기업을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고, 정부의 중앙인사위원회를 찾아가 많은 자료와 격려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하여 도입된 주요 제도들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핵심역량체계를 비롯한 여러 제도의 근간이 되었다. 이 또한 어렵고 힘들었지만 후회 없는 아름다운 순간들로 기억된다.
책장 가득한 고민의 흔적이 담긴 책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온다. “밑줄과 접힘, 온몸이 포스트잇으로 도배가 되어 망가져도 그만큼 당신에게 지식을 주어서 자기는 행복하고 좋았다”라고.
바로 지금의 현실에 충실하라.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은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순간임을 이야기한다. 시간의 흐름은 연장선상에 있다. 지금까지 따분한 일상이 반복되고 새로운 도전이 소멸된 하루가 지속되고 있다면, 오늘도 그럴 것이고 내일도 그렇게 생활할 것이다. 소모성 삶의 편안함에 익숙해지면 자기경쟁력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주장하며 칼퇴근이 대세라고는 하지만, work의 영역과 life의 영역이 서로 보완해 주는 패턴이 되어야 직장과 개인의 상생의 밸런스가 이루어진다. 늦지 않았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새로움에 도전해 보는 자기 혁명의 순간을 오늘 맞이해 보자. 나무의 나이테에는 사계절 변화에 적응해 온 성장기록이 담겨있듯이 자신이 알게 모르게 오늘을 사는 모습은 누적되어 자신만의 무늬가 드러나게 된다. 자기의 흔적은 인사기록부에 고스란히 담겨지며, 매 순간마다 후배들이 지켜 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자리를 떠나거나 직장생활을 마무리할 때, 후배들에게 당신이 떠난 자리의 허전함과 그리움을 남겨줄 수 있도록 이 순간을 나답게 생활하자.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며 걱정만 하거나 변화 없는 일상을 되풀이하기 보다는 새로운 도전과 자신이 묻고 답하는 현재의 이 순간이 나만의 ‘화양연화’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