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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에게

나무가 들려주는 경영이야기 11

나무의 유산(遺産)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책은 나무의 유산이자 우리 마음을 키워주는 양식이다. 이 양식을 오래 보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 달은 책의 쓰임에 대해 생각해보자.

글_단국대학교 경영대학원 박홍규 교수
(前 한전KPS 원자력연수원장)

가을은 또 다른 봄의 시작

가을을 부르는 칠자화나무

아침과 저녁으로 서늘한 기운과 개구리들의 합창이 불현듯 풀벌레 소리로 바뀌며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식재 계획에 따라 심은 나무들은 봄부터 가을의 문턱까지 연이은 개화로 인하여 축제의 꽃마당을 이루어 왔다. 밤공기가 찬 이즈음에도 마당 한편에는 배롱나무(Dynamite), 칠자화나무와 구기자의 작은 꽃들이 계절이 바뀜을 속삭인다.

자연의 순환을 따르는 것인가. 잎의 싱그러움과 풍성함이 오래 지속될 수 없듯이 사람의 열정 또한 나이 들며 희미해진다. 가을이라는 시간의 마디 끝에서 빛바래가는 잎들과의 이별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우리들 또한 낡은 습관과 생각의 가지를 정리해야 할 계절을 마주하고 있다.

어느덧 가을의 문턱이다. 나무는 찬 바람이 불면 생장을 멈추며 지난여름의 왕성한 잎들을 제각각의 가을색으로 물들이며 뿌리로 돌아갈 시기를 기다린다. 사람의 기대수명을 84세로 볼 때, 50~60대의 나이는 가을에 해당될 것이다. 마음의 집착을 내려놓고 내가 제대로 왔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갈무리해야 할 사색의 시간이다. 사람은 54세가 되면 열정이 사그라진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론적으로는 나이가 들어도 무언가를 하는데 열정적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진심으로 관심이 있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가을은 잎이 꽃이 되는 또 다른 봄의 시작이기도 하다. 초록의 옷차림을 자신만의 단풍색으로 바꿔가는 계절의 문턱에서 무성했던 잎들은 바스락거리며 다가올 ‘버림과 쉼’의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 새잎을 돋우면서 나무들의 시련은 계속되었다. 해충과 비와 바람, 강렬한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꿋꿋이 자리를 지켜왔다. 이렇듯 자신의 계절을 맞이하기까지 식물들은 힘든 시간을 보낸다.

또한 다른 꽃이 만발할 때면, 각자의 피는 시간이 다를 뿐임을 인정하고 준비하며 묵묵히 무대의 조연이 된다. 때로는 꽃이나 잎으로 자기만의 개성을 한껏 뽐내지만 물러날 때를 알고 저물 줄을 안다. 말 없는 가르침이다. 생강나무, 미산딸나무, 설중매는 해를 넘기며 결국 고사했지만 좀작살나무, 가죽나무, 적목련, 목백일홍, 포도나무 묘목들은 다시 잎을 내밀며 나무는 쉽게 죽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정원의 사계는 생명들의 생사가 어우러져 나름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삶의 현장과도 같다.

나무의 유산, 종이와 책

과거의 흔적이 담긴 책장

우리가 매일 쓰고 버리는 종이는 나무들이 남긴 유산의 일부분이다. 글자가 켜켜이 쌓인 책으로 지식을 전하기도 하며 포장지, 휴지로 바뀌어 마지막까지 그들의 소임을 다한다. 나무의 숱한 고난과 시련의 흔적이 담겨 있는 한 장의 종이는 책으로 변하여 사색의 지평을 열어 줄 지식의 마중물이 되기도 한다.

입사하면서 월급의 일정한 부분을 자기개발에 투자하기로 마음을 다지고 실천해 왔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월급이 오른 것과 비례하여 책이 쌓여가는 높이도 감당 못할 한계점을 넘게 되었다. 맡은 업무와 연관된 지식의 확장을 위해 관련 도서를 구입하거나 자료를 모으다 보니 책과 서류 더미에 묻힌 셈이다. 젊은 날의 흔적이 서려있는 책들과 마주하면 그 당시의 내가 오롯이 나를 반긴다. 그러니 어쩌랴. 버리지 못하는 책에 대한 미련이 길 수밖에. 품고 지내온 책들을 버리지 못함은 펼칠 때마다 마주하는 그 시절의 나와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어진 밑줄, 접혀진 책 귀퉁이, 페이지 한편에 기록된 메모들 모두가 나를 키워낸 흔적들이다.

비가 잦았던 이유로 정리하지 못하고 마당에 쌓아둔 책들이 빗물에 젖고 곰팡이가 생기고 말았다. 미련이 화를 불러온 셈이다. 이제는 우아하게 나이 듦을 위하여 욕심을 내려놓아야겠다. 보낼 때가 온 것이다.

한 때는 장식용 전집들로 가득 찬 책장으로 자신을 돋보이려 했던 ‘과시적 교양주의’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 곁을 지켜온 책들은 젊은 날의 관심과 호기심이 이끈 결과물이자 새로운 아이디어를 퍼 올리는 샘터와도 같았다. 맡겨진 프로젝트와 관련된 책, 업무와 관련된 경영서적, 전공도서, 심리학, 음악, 미술, 철학, 한의학, 한시고전, 건강, 육아, 음식, 건축, 조경, 풍수, 역사 등 5단 책장에 등을 묻고 있는 책들은 나름의 선택 이유와 관심사의 흐름이 반영된 것이다.

생을 다한 나무를 위한 변명

이삿짐센터에서 제일 싫어하는 물품은 책과 화분이라고 한다. 무겁기 때문이다. 책의 무게만큼이나 지식과 인품이 쌓여간다면 좋으련만 공간을 차지하는 책으로 근심만 쌓인다. 이제는 유행처럼 지나간 낡은 책들은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지만 보통은 폐지로 처분해 버리는 것이 일상이다.

책은 깨끗한 책(대부분 발췌독 대상), 지저분한 책(마음에 와닿는 구절에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며 접힌 부분이 많은 대상)으로 분류된다. 지저분한 책으로 분류된 책들은 들춰볼 때마다 때로는 아이디어와 감동을 주었던 글귀들로 가득하다. 형형색색의 밑줄로 입혀진 책들을 펼치면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미소를 짓는다. 지금의 나를 키워준 밑줄의 위력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온갖 풍상을 겪은 나무의 유산이자 나를 지켜준 책들을 이대로 떠나보내야 할까. 나에게 불필요한 것이 타인에게는 필요한 물건이 될 수도 있다. 책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도록 나눔이 필요하다. 그중 몇 가지를 보자.

첫째, 자신들의 흔적이 담긴 도서를 기부해 사내도서관의 한 코너를 운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새 책은 아닐지라도 공감을 주었던 문구, 삶의 나침판이 되었을지 모르는 동료들의 책들을 통해 삶의 지혜를 나눠보는 것도 좋겠다.

둘째, 사내에 상설 도서나눔터를 운영하여 서로 필요한 책을 바꾸거나 저렴하게 내놓는 것은 어떨까. 판매수익금은 적립해서 소외된 곳을 도와주는 것도 좋으리라 본다.

셋째, 그래도 넘치는 책들이 있다면 책을 필요로 하는 곳에 기증해 보는 것은 어떨까. 꼭 새 책만이 기증물품이 아니다. 요즘에도 헌책방을 찾는 사람들은 묵은 흔적들을 좋아한다.

가을이다. 온갖 시련을 품고 우리 앞에 놓인 나무의 유산인 책을 보듬고 책의 향기에 취해보자. 잎이 나고 지는 때를, 꽃이 피고 지는 때를, 우쭐대지 않고 자신만의 매력을 뽐낼 줄 아는 나무를 위한 변명이 길었다. 책에 취해 사노라면 인품은 그만큼 짙어질 것이다. 봄부터 피어 온 꽃의 향기는 백 리를 가지만(花香百里), 그윽한 인품의 내음은 만 리를 간다(人香萬里)고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