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테마 에세이

사람을 이루고,
어우러지게 만드는
말과 글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주로 언어를 이용해 서로 소통한다. 성대와 입을 통해 만들어진 청각정보를 담은 발화언어가 말이라면, 물리적 실체를 가진 매체에 시각정보로 담긴 문자언어가 글이다. 기나긴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이 지금처럼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은 바로 인간의 사회성 덕분이다. 다른 이의 마음을 마치 자신의 마음처럼 떠올릴 수 있는 사회적 공감과 한 사람이 새로 알아낸 것을 다른 사람이 보고 들어 배우는 사회적 학습이 인류의 놀라운 성공의 바탕이다. 말과 글을 통한 서로의 연결과 소통은 흩어진 ‘여럿’을 함께 하는 ‘우리’로 만들어 인류의 성공을 이끌어냈다. 사람이 만든 말과 글이 거꾸로 지금 인류의 모습을 만든 셈이다.

글_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김범준 교수

사고를 바꾸는 말과 글

뇌과학과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감정과 이성도 손바닥 위에 올라갈 정도로 작은 우리 뇌 안 천억 개 신경세포 사이 연결의 결과다. 사람의 뇌 안, 내부 연결의 배선을 바꾸는 방법은 둘 뿐이다. 외과적 수술, 그리고 말과 글이다. 말과 글은 비외과적인 안전한 방법으로 뇌 안의 내부 배선을 장기적으로 바꾸는, 거의 유일하고 확실한 효과적인 수단이다. 말과 글로 전달된 정보로 내 뇌는 바뀌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달라진다. 말과 글은 나를 바꾼다.

우리의 사고(思考) 역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구조를 따른다. 하루 종일 우리말이 아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던 타국에서의 젊은 시절, 영어가 그나마 좀 익숙해질 때의 흥미로운 경험이 떠오른다. 혼잣말을 가끔 영어로 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꿈도 영어로 꾼 적이 있다. 사람의 말과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이 외부로 표출되는 수단이지만, 거꾸로 내가 하는 말과 내가 쓰는 글이 나의 생각을 규정할 때도 정말 많다.

과학에도 독특한 말과 글이 있다

과학의 말글은 수학의 형태를 가질 때가 많다. 과학자 갈릴레오가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적혀있다”고 했듯이 말이다.

특히 물리학에서 수식은 자연현상을 효율적으로 기술하는 놀라운 방식이다. 한글 자모에 해당하는 수학기호가 언어의 문법 규칙처럼 서로 관계를 맺어 자연현상을 함축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수식이다.

한 줄의 수식은 우리 일상의 말글의 길이를 획기적으로 줄여 과학자 사이의 효율적인 소통에 기여한다. 사람들은 과학자가 어려운 수식을 자꾸 쓰는 것이 불만이지만, 과학자들이 젠체하려고 수식을 쓰는 것은 아니다. 수식을 쓰면 논의의 전개가 훨씬 더 쉽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도 말글과 생각은 양방향 소통한다.

글, 말의 범위를 확장시키다

그렇다면 생각과 양방향 소통하는 말과 글은 처음부터 한 쌍이었을까? 글보다 말이 훨씬 오래전에 탄생했다. 다양한 음성신호를 발화할 수 있는 해부학적 인체 구조가 출현한 시점은 언제일까?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으로 짐작해도 짧게는 수십만 년 전의 일이고, 길게는 2백만 년 전으로 추정하는 과학자도 있다.

한편 글은 인류의 역사에서 극히 최근의 발명품이다. 지금부터 5천 년 전 무렵의 일이다. 말은 사람 사이의 실시간 정보 전달을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휘발성의 문제를 아울러 가진다. 한번 입에서 음성으로 발화한 말은 공기를 통해 파동의 형태로 다른 이의 귀에 닿는다. 말한 이와 듣는 이 사이 시공간 한 점을 순식간에 통과한 말은 그 안에 담긴 정보를 듣는 이의 머릿속 기억으로 변환한다. 문제는 우리의 기억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자도 한번 해보시라. 처음 들은 휴대폰 전화번호는 딱 10분만 지나도 기억하기 어렵다. 물론 반복은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지만, 인간의 장기기억도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며 오랜 기억은 사라지고, 또 엉뚱하게 왜곡되기도 한다.

휘발해 사라지는 말에 담긴 정보가 시간의 흐름을 버티며 오래 지속되려면, 우리 뇌 밖 외부의 저장장치가 필수다. 바로 글이 탄생한 이유다. 글은 뇌 밖에서 많은 이가 공유할 수 있는 공용 기억 저장장치다. 오랜 인간의 역사에서 현재의 클라우드 저장장치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책과 같은 글의 기록이다. 글은 딱 몇 사람만 소유할 수 있었던 일회성 음성정보의 시공간 규모를 획기적으로 확장한다. 말이 글이 되면 정보는 여러 사람에게 전달되어 말의 공간적 제한을 넘어서고, 말의 청각정보가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매체에 담겨 시각정보로 바뀌면 글은 말의 시간적 제한을 넘어선다. 글은 화석으로 고정된 말이다.

우리말과 어울리는 글, 한글

음성정보인 말이 시각정보로 바뀌어 담긴 것이 글이라면, 말과 글은 서로 어울려야 한다. 오랜 동안 말과 글이 달랐던 우리나라에서, 둘 사이의 일치가 이루어진 것이 바로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의 탄생이다.

고등학생 때 인상 깊게 배운 훈민정음 서문에는 나라의 말이 중국의 글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세종의 문제의식과 그로 말미암은 글과 말의 괴리로 고통받는 모든 백성을 생각하는 세종의 애민의식이 담겨있다.

한글은 지구 위 다른 어떤 글과 달리 생일이 명확히 알려진 유일한 글자이기도 하다. 다가오는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말에 맞는 글을 갖게 된 것을 축하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전 세계에서 글의 탄생을 축하하는 생일을 유일하게 가진 우리 모두가 기쁘게 자축할 의미 있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