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ERGY+

후배들에게

나무가 들려주는 경영이야기 6

나무의 역습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며 ‘혁신’이란 말을 자주 접한다. 그러나 정말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나무를 통해 우리 주위의 혁신을 되돌아보자.

글_단국대학교 경영대학원 박홍규 교수 (前 한전KPS 원자력연수원장)

어느 봄날의 안전사고

겨우내 움츠렸던 나무들은 4월을 지나 5월에 이르며 각자의 색깔로 마당에 꽃그림을 선사한다. 매화꽃이 꽃비가 되어 내리면 배꽃이 피고 지며 자산홍, 영산홍의 철쭉꽃 잔치가 눈을 즐겁게 한다.

나무는 인간에게 많은 혜택을 베풀어 주었다. 그늘과 숲을 이루어 쉼터를 제공하였고 우리에게 유용한 목재와 연료를 주었다. 무엇보다도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광합성을 통해 산소를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벌채는 자연재해를 불러왔고 인간의 사소한 방심의 빈틈을 파고들어 안전사고의 재해를 입히기도 한다.

나무를 가공하여 생산한 물건 중에는 인간에게 유해한 요인으로 되돌아오는 것도 있다. 수입된 일회용 나무젓가락 중 일부가 소독, 표백, 광택작업 등 제조과정에서 이산화황 등 유해물질을 사용하여 인체에 해를 끼치는 것은 물론 자연 분해되기까지는 20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1톤의 종이를 소각할 때 0.04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풍파를 견디다가 쓰러져간 나무들이 인류에게 가하는 최후의 역습이 아닐 수 없다.

4월의 따스한 봄볕을 받으며 나무를 자르는 작업을 하다가 순식간에 안전사고가 일어났다. 소형전동톱을 사용하던 중 공구가 갑자기 몸쪽으로 튀어 오르는 순간 막으려던 왼손 엄지손가락이 절단될 뻔한 사고였다. 목재 절단작업 중에는 마찰력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절단된 목재나, 사용하고 있는 공구가 작업자에게 날아와서 심각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것을 킥백(Kick back) 현상이라고 한다.

회전운동을 하는 전동공구에서 톱날 상단 부분이 물체에 닿았을 때 발생하는 킥백현상은 아주 빠르고 위협적이다. 모든 회전하는 톱은 킥백이 발생할 확률이 항상 있다. 강한 힘을 가할수록 반발력은 커진다. 기계톱은 예리한 칼날이 고속으로 회전하므로 반드시 집중력을 가지고 다뤄야 한다. 사고의 원인은 공구사용법에 따라 두 손으로 전동기를 잡고 사용했어야 함에도 한 손에는 목재를 잡고 한 손은 전동기를 잡은 채 작업을 하다가 순식간에 발생하였던 것이다. 안전수칙을 가볍게 여긴 결과는 혹독했다. 끊긴 손가락 힘줄과 신경을 봉합하고 한 달 동안의 깁스와 지속적인 재활치료를 권고받았다.

안전사고는 산업현장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안팎에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소방청 발표에 의하면 지난 3년간 산, 강, 바다 등 야외에서 발생한 안전사고로 119구급대가 출동한 건수는 봄철(3월~5월)이 겨울철에 비해 72.5%나 증가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른한 봄철의 안전사고 예방에 더욱 유의해야 하고, 안전수칙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뒤에야 안전수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어리석은 짓이다.

일상화된 혁신의 반작용

흔히들 조직의 현상타파를 위하여 권력의 중심축이 바뀔 때마다 혁신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작을 알린다. 지금까지 반복된 혁신이 현실화되었다면 지금쯤 모든 조직은 초일류기업으로 진화되었어야 한다.

현실은 어떠한가? 조직의 혁신활동이 구호성, 일회성 차원의 요식행위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실적만 요구받는 혁신활동이라면 조직구성원들의 혁신 수용성은 낮아지기 마련이다. 혁신의 강도와 빈번함이 누적될수록 혁신의 피로감은 쌓여 결국 무감각해진다. 혁신수용성은 혁신성과와도 상당한 관계가 있다. 혁신수용성이 낮아질수록 혁신성과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일상화된 위로부터의 혁신의 요구에 사람들은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유행처럼 부서명에 혁신이라는 명칭이 붙고 상명하달식으로 혁신과제가 현장 하부조직으로 전달된다. 현장조직에서부터 혁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확산되어야 혁신성과를 얻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관행적으로 되풀이된다.

동아비즈니스리뷰의 분석자료(2010.4월)에 의하면 경영자의 적극적인 참여는 혁신의 성공을 좌우할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되지만 혁신성과와는 큰 관계가 없다고 한다. 위로부터의 형태(정부주도형 혁신과제, 경영진의 혁신주도, 본사 중심의 실적관리 활동)도 마찬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그 이유는 톱다운 방식의 혁신은 실행 주체인 조직구성원들에게는 다소 강압적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으로 본다.

즉 혁신의 주체는 조직구성원이 되어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참여와 혁신과정을 주도해 나갈 때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것이다. 해를 거듭해도 혁신이 핫이슈가 되는 이유는 위로부터의 반복되는 혁신주문에 비해 성과는 빈약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혁신성과를 압박받게 되면 혁신보다는 부분개선에 가까운 실적나열에만 치중하게 된다. 혁신의 역습이다.

온갖 풍상을 겪어 온 나무들은 사람들의 방심한 순간을 파고들어 손상을 입히고 재해를 일으키듯이 강력한 혁신에는 혁신압력의 크기만큼 강력한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것은 학습된 무력감이 아닐까 싶다. “또 혁신이야?”라는 인식이 확산되면 혁신의 추진동력은 힘을 잃게 된다. 혁신은 기존의 상식을 부정하고 독창적이며 경제적인 가치를 지닌 개선을 뛰어넘는 수준의 새로움을 이끌어내는 활동이다.

혁신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이어질 것이다. 진정으로 조직혁신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러 혁신의 불씨를 일으키려고 할 때 제대로 작동될 수 있을까? 양치기 소년은 외친다. 이대로 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