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테마 에세이

하나의 지붕 아래 모인 사람들


글_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김범준 교수

가족의 사전적 의미

가족을 한자로 적으면 家族이다. 두 한자의 근원을 각각 찾아보니 재밌다. ‘家’는 지붕 아래에 돼지가 함께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오래전 농경이 발달하면서 돼지가 가축화된 후, 돼지를 집에서 함께 길렀던 과거의 역사가 담긴 글자인 것이다. 요즘에 다시 이 한자를 만든다면, 어쩌면 돼지가 아니라 강아지나 고양이가 지붕 아래에 놓일지도 모르겠다.

‘族’도 재밌다.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의미하는 한자(㫃)에 화살(矢)을 뜻하는 글자가 함께 들어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오래전 다른 씨족과 싸울 때, 같은 깃발 아래 모여 함께 힘을 합해 싸우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다른 동물과도 어울려 한 지붕 아래에서 함께 살다가 싸움이 일어나면 모두 힘을 합하는 사람들이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에는 가족과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식구(食口)라는 말도 있다. 함께 밥 먹는 이들이 바로 내 식구다. 아침에 만나면 “좋은 아침!”이 아니라 “밥 먹었니?”라 말하고, 한솥밥을 먹는 사이로 가족을 얘기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이 힘들면 밥심으로 버틴다. 이웃과의 마음의 거리도 그 집에 밥 먹는 수저가 몇 벌 있는지,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로 측정한다. 가족이나 식구나, 둘 모두 혈연관계의 의미가 없다는 것도 재밌다. 한 지붕(宀) 아래에서 함께 매일 밥 먹는(食) 사이가 가족이다.

성씨로 보는 가족의 규모

세상에서 가족의 규모가 가장 큰 나라로는 우리나라가 일등이다. 성씨를 영어로 ‘family name’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의 김 씨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숫자가 1천만 명이고, 범위를 좁혀 필자의 성씨 본관 김해김씨를 봐도 400만 명이 넘는다.

외국에서 살던 시절, 한 체코 출신 동료에게 우리나라에는 정말 김 씨가 많다고 얘기해준 적이 있다. 이 동료가 다른 물리학자와 한국인 물리학자가 쓴 어떤 논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체코 출신 내 동료가 혹시 그 논문 저자가 Kim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논문 얘기를 하던 다른 물리학자가 어떻게 네가 논문 저자 Kim을 아냐고 깜짝 놀라 물어봤다는 재밌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남산에서 돌을 던져 누군가의 머리에 맞았다면 그 사람은 김 서방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니, 당연히 그냥 눈감고 Kim이라고 예측해도 높은 확률로 논문 쓴 한국인 물리학자의 성씨를 맞출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 이렇다.

2000년 통계조사에 따르면 오천만 인구가 딱 300개 정도의 성씨만을 가져서, 종이 한 장에 그 나라에 있는 성씨를 모두 적을 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서로를 돕는 과학에서의 가족

우리말로 가족이라고 번역하기는 좀 무엇해도 과학에도 가족(family)이 자주 등장한다. 물리학에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입자들을 두 개의 가족으로 나눈다. 페르미온(fermion)과 보손(boson)이다.

페르미온은 우주의 온갖 물질을 구성하고 보손은 페르미온 사이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입자다. 페르미온 가족의 식구로는 6종류의 쿼크와 6종류의 렙톤이 있고, 보손 가족으로는 몇 년 전 새로 발견된 힉스 입자를 포함해 5식구가 알려져 있다.

페르미온과 보손의 두 가족은 다른 깃발 아래 끼리끼리 모여 서로 싸우기는커녕 다른 가족을 도와 만물의 존재를 가능케 한다.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보손이 없다면 나와 당신을 이루는 물질도 존재할 수 없고, 보손만 있다면 함께 모일 존재 자체가 없다. 나나, 당신이나, 세상 모든 만물은 페르미온과 보손, 두 가족이 서로 도와 만든다.

혈연관계를 넘어선 가족의 범위

물리학의 기본입자 가족(family)은 분명한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현실 가족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예전 한 기업광고에 등장해 유명한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문구도 떠오른다. 나와 같이 한솥밥을 함께 나누는 식구가 아니어도 가족의 범위는 얼마든지 확장 가능한 것일 수 있다.

혈연관계의 의미가 담기지 않은 한자 ‘家族’을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한 부모가 낳아 핏줄로 연결되었다고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한 시간이 쌓여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인류 역사에서도 공동체의 반경은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다. 씨족사회가 부족사회가 되어 결국은 민족을 이루었고, 현대의 국가는 더 이상 민족에 기반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현대의 가족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오래전 작은 집의 지붕(宀) 아래 모인 식구로 이루어진 것이 전통적인 가족이라면, 이제 그 지붕은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직장 동료와 함께 일하는 건물의 옥상일 수도 있다. 집에서 아침을 함께하는 사람도, 출근한 직장에서 점심을 함께하는 동료도, 모두 하나 같이 한 지붕 아래 내 가족이다.

지붕이 꼭 물질적일 필요도 없다. 어쩌면, 함께한 시간과 공유한 경험이 현대의 확장 가족의 지붕일 수 있다. 또, 가족마다 다른 깃발(㫃) 아래에 모여 무기(矢)를 들고 다른 가족과 싸우는 모습은 먼 과거의 일일 뿐이다. 공통의 경험으로 확장된 넓은 지붕 아래에 모인 존재가 모두 가족이라면, 지구 전체의 지붕 아래 모인 모든 생명이 한 가족일 수도 있겠다. 난 지구 가족의 깃발은 딱 하나라고 믿는다. 모든 생명은 운명 공동체다. 지구 가족이 둘러앉은 큰 솥도 딱 하나다. 지구 위 모든 생명은 한 가족, 한 식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