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테마 에세이

큰길과 샛길


글_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김범준 교수

내가 선택한 ‘업(業)’

나는 대학교수다. 교육과 연구가 업(業)인 사람이다. 둘 다 정말 좋아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 새롭게 알게 된 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설명했는데, 수업을 듣는 학생이 눈빛을 반짝이며 “아, 그 얘기였구나!”하며 이해하는 순간을 바로 앞에서 직접 목격할 때가 간혹 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생생한 교감의 순간이다. 그때의 뿌듯한 느낌을 정말 좋아한다.

연구도 좋아한다.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있는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연구를 시작해 이런저런 방식을 힘들게 고민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투명해 보이는 순간이 올 때가 있다. “아,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구나!”하는 깨달음의 순간은 정말 짜릿하다.

노벨상 받을 만한 결과도 단연코 아니고, 나 말고는 전 세계에서 극히 소수의 연구자만이 흥미를 느낄 작은 성과라고 해서 기쁨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몰랐던 것을 새로 속속들이 이해하게 되었을 때의 그 생생한 느낌이 과학자가 매일 연구를 이어가는 원동력이다.

법조인이면 부부 모두 행복하고, 의사라면 배우자만 행복하며, 교수는 본인만 행복하다는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아내의 속마음은 잘 모르지만, 물리학자이자 교수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난 어쨌든 참 행복한 사람이다. 정말 좋아하는 일이 생계의 수단이 되는 ‘덕업일치’의 삶을 살고 있다고나 할까.

‘취미’라는 샛길

그런데 말이다. 덕이 막상 업이 되고 나면, 우리 모두는 업이 아닌 다른 ‘덕’을 찾게 된다. 우리가 보통 ‘취미’라고 하는 것들이다. 매일 걷는 길 바로 옆 작은 샛길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곁눈질로 본, 아직 접어들지 않은 길은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는지.

‘꼭 해야 하는 것’과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업’과 ‘덕’을 가른다면, ‘덕’은 ‘업’에 없는 놀라운 장점이 있다.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얼마든지 다른 샛길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업’의 큰길과 달리, ‘덕’이라는 샛길은 한 번에 여러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모두 생각해 보라. 세상 속 우리는 참 희한하다. 하라고 하면 하기 싫어지고,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궁금해져서 해보고 싶어진다. 마감일이 코앞에 다가와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잠깐 읽기를 멈춘 소설의 결말이 난 또 갑자기 궁금해진다.

올해 1월 1일부터 매일 아침 연구실에 출근하면 우리 선조의 칠언절구 한시를 하루에 한 편씩 한자로 옮겨 적고 있다. 올해 처음 걷기 시작한 작은 ‘덕’의 샛길이다. 매일 아침 잠깐의 이 시간이 내게는 참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다. 급한 이메일 답장을 보내며 시작한 하루보다, 한시 한 편 읽고 새기며 시작한 하루가 더 즐겁다. ‘덕’은 ‘업’의 활력소다.

더욱 즐겁게 걷는 방법

매일 걸어가는 큰길에서 발걸음을 옮겨 작은 골목길로 한번 접어들어 보자. 미처 몰랐던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나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내가 몰랐던 사람들이다. 샛길에서의 새로운 경험은 내일 다시 걸어갈 내 앞길을 더 풍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에 물리학자가 드물지만, 내 곁에는 주로 물리학자만 있었다. 물리학자이자 대학교수로서의 삶을 살다 몇 년 전 첫 책을 냈고, 책을 낸 다음에는 만나는 사람들의 폭이 넓어졌다. 물리학자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전부가 아니며, 같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다. 매일 내가 걷고 있던, 폭넓은 큰길이라 믿었던 그 길이 사실은 세상의 작은 골목길 중 하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외 없이 모두가 꼭 걸어야 하는 곧은 큰길은 세상에 없다. 세상의 모든 길은 하나같이 정겨운 골목길이다. 내 길이 맞고 네 길이 틀린 것이 아니다. 두 길이 다를 뿐이다. 얽히고설켜, 하지만 함께 연결되고 이어지는 수많은 골목길이 세상의 풍경이다.

세상 모두가 각자 걷는 자기만의 골목길은 재밌는 특성이 있다. 즐기면 더 잘 걷게 되고, 더 잘 걸으면 더 즐기게 된다.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 일을 즐기려 노력해보자. 빨리 걸으려 하기보다는 즐기며 걷는 것이 더 잘 걷는 것이다. 굳이 빠르게 곁을 스쳐 앞서가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자. 그 사람은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같은 길도 옆 동료와 함께하면 더 즐겁다. 친한 친구와 도란도란 얘기하며 걷는 멋진 산책길의 ‘시간순삭’처럼 말이다.

내가 매일 걷는 길 바로 옆 샛길의 풍경도 감상하며 걷자. 잠깐씩 짬을 내 걷는 샛길이 주는 기쁨은 내가 매일 걷는 이 길도 더 즐겁게 한다. 샛길이 있어 이 길을 계속 걸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