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테마 에세이

매일 같은 하루,
그 끝에 불현듯 만나게 되는 것


글_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김범준 교수

결실을 기다리는 힘, 상상

이제 가을에 접어들고 있다.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힘들게 일한 농부의 땀방울이 드디어 결실을 볼 때다. 벼는 농부의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이 있다. 농부가 흘린 땀이 결정으로 모여 씨앗이 되는 셈이다. 농부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절한 햇볕,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당한 정도의 비가 논밭을 적셔 씨앗이 된다. 아무것도 심지 않고 가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거둘 수 없지만, 심고 가꾸어도 자연이 돕지 않으면 또 아무 결실도 거둘 수 없다. 내가 거둔 모든 성과는 나뿐 아니라 세상 속 모두가 함께 도운 결과다.

처음 씨앗을 뿌려 농경을 시작한 먼 선조를 떠올린다. 소중히 땅에 묻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자라 결국 큰 결실로 돌아오기까지 몇 달이 넘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산과 들에서 몇 시간만 찾아다녀도 그날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었던 수렵채집 시기의 선조들에 비하면, 엄청난 시간의 기나긴 기다림이었음에 분명하다. 봄에 씨 뿌려 가을에 거둘 때까지의 긴 시간을 우리 선조들은 도대체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오늘 아침에 본 작물은 하루 전 어제 아침에 본 작물과 비교해 딱히 달라진 것도 없어 보이는데 말이다.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다. 현재의 어린 새싹의 모습에서 미래의 풍성한 결실의 장면을 미리 떠올리고,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 동안 묵묵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선조다. 인간은 현재의 모습에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독특한 존재다.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 사람은 현재를 버틸 수 없다.

실패를 거듭해서 보게 되는 결실

어떤 결실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길고도 지루한 노력과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서야 결국 우리는 결실을 거둔다. 우리가 매일 매일 진행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몸담은 물리학 분야에서의 연구도 그렇다. 하루하루 진행되는 연구 과정을 되돌아보면, 막다른 길을 만나 발걸음을 돌린, 끊어진 샛길이 부지기수다. 이렇게 해보고 안 되면 다음에는 저렇게 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다음에는 다시 갈림길로 돌아와 또 다른 길을 모색한다. 수많은 실패 후 다시 돌아와 보니 몇 달 전 바로 그곳이었던 적도 많다.

그런데 말이다. 막다른 길에 잘못 들어선 그 많은 시행착오의 길에 쌓인 발자국과 땀방울이 결국은 새로운 길을 보여줄 때가많다. 그길로 가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도 어쨌든 가보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 없다. 과학 연구의 성공은 갔다가 돌아온 수많은 실패의 다른 이름이다. 최종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쓸 때 처음 출발한 곳에서 목적지까지 단 한 번에 걸어갔다고 적을 뿐이다. 논문에 활자화되지 못한 샛길의 실패를 모두 모으면 출판된 논문의 수십 배 길이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

기다림의 끝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것

오늘도 어제와 딱히 다를 것 없어, 도대체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이 길이 맞는 것인지, 잘못 들어선 길은 아닌지,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캄캄한 오솔길을 걸어갈 때는 불안하기도 하다. 그래도 수십 년 한 분야에 머물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 뭐라도 점점 쌓이면 뭐라도 된다는 사실이다. 연구가 결실을 보고 이제 드디어 내가 이 문제를 이해했다는 깨달음의 순간은 어느 날 번개처럼 닥친다. 그제와 다름없던 어제, 어제와 다름없던 오늘 아침, 딱히 더 달라진 것도 없어 보여도, 깨달음의 결실은 예고 없이 불쑥 닥칠 때가 많다.

내가 몸담고 있는 통계물리학 분야에 ‘상전이’라는 개념이 있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듯이 물질의 특성이 급격히 변하는 것이 상전이다. 액체상이 기체상으로 바뀌는 순간은 불현듯 다가온다. 99도까지도 아무 일 없이 액체로 있던 물은 100도에 도달하면 갑자기 끓기 시작한다. 우리가 99도까지 온도를 올리려 공급한 열에너지로 물의 겉모습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1도를 올려 100도에 도달한 순간 물은 끓기 시작한다. 온도가 조금씩 오르는 길고 지루한 과정 도중에 좌절해 포기한 사람은 결국 끓는 물을 보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힘든 중도의 과정에서 발걸음을 포기한 사람은 결국 달콤한 결실을 보지 못한다.

요즘 코로나 걱정이 많다. 감염병이 어떻게 확산되는지를 설명하는 간단한 이론 모형이 있다. 이 모형을 컴퓨터로 구현해서 살펴보면 흥미로운 특성을 볼 수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 속 가상의 세상에서 백신을 맞은 사람의 수를 점점 늘려가다 보면, 마치 물이 100도에 도달해야 갑자기 끓듯이, 백신 접종자가 특정 숫자에 도달하면 갑자기 감염의 대규모 확산이 멈춘다. 딱히 큰 변화가 없더라도 우리 모두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백신 접종자를 함께 늘려가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감염확산의 걱정에서 벗어날 시점은 어느 날 불현듯 올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희망을 갖고 함께 하는 노력을 이어간다면 말이다.

모든 결실은 그때까지 쌓인 노력이 만든다. 해와 비가 도움을 준 것처럼, 나 혼자의 노력뿐 아니라 다른 이의 도움도 중요하다. 과거에서 오늘까지 길게 이어진 진전 없어 보이는 과정에서도 희망을 갖자. 불현듯 내게 다가올 미래의 결실을 미리 떠올려 상상하자. 결실은 갑자기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