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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에세이

‘비움’이 채워주는 힘


글_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김범준 교수

나무토막은 물에 뜬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빈 병도 물에 뜬다. 그런데 쇳덩이로 만든 것도 물에 뜰 수 있다.

무거운 강철로 만든 큰 화물선은 바다 위에 떠 세계 이곳저곳으로 엄청난 양의 화물을 실어 나른다. 강철로 만든 잠수함이라도 바다 밑바닥에 딱 붙어 바퀴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깊은 바닷물 속에서 위아래로 얼마든지 뜨고 가라앉을 수 있다. 물리학에서는 물과 같은 유체 안에서 발생하는 부력으로 설명하지만, 밀도가 큰 재료로 만들어졌어도 물에 뜨는 모든 것들이 이용하는 원리는 무척 간단하다. 속을 비우는 것이다.

잠수함과 물고기가 가라앉지 않는 이유

어려서 수영장에서 놀 때,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은 물놀이공을 자주 가져갔다. 가만히 두면 물 위에 저절로 떠있는 이 공을 손으로 밀어 물속으로 넣으면, 그리 크지 않은 공인데도 수면으로 오르려는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물속을 다니는 무거운 강철 잠수함이 이용하는 원리도 똑같다. 물이 가득 찬 탱크를 안에 두고는 옆에는 고압으로 압축한 기체 탱크를 연결한다. 기체 탱크의 밸브를 열어서 강한 압력의 압축 기체를 물이 들어 있는 탱크 쪽으로 보내 물을 잠수함 밖으로 밀어내면, 기체보다 무거운 물이 잠수함 밖으로 밀려나 잠수함 전체의 평균 밀도가 줄어든다. 전체의 평균 밀도가 물의 밀도보다 작아지면 잠수함은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잠수함을 해저로 가라앉게 하고 싶을 때는 거꾸로 탱크에 물을 가득 채운다. 위로 오르려면 안을 비울 일이다.

어려서 친구들과 개천에서 민물고기를 잡고는 했다. 잡아놓은 물고기는 죽자마자 금방 상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 물고기의 내장을 제거하면 금방 상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물고기 배 쪽을 손톱으로 눌러 가르고 물고기 내장을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밖으로 밀어내는 것을 물고기 “배를 딴다”는 속어로 불렀던 기억이 난다. 물고기 배를 따면, 작은 풍선이 함께 따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물고기 부레다. 부레에 들어 있는 공기의 부피를 줄였다 늘였다 하면서, 물속 물고기도 잠수함처럼 위아래로 수면에서의 깊이를 바꿔가며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다. 잠수함도 부레가 있는 셈이다.

비움이 가진 힘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공기는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해 그렇지 사실 엄청난 압력을 만들어낸다.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 가로세로 1cm인 작은 정사각형 모양을 그려 보라. 새끼손가락의 폭이 약 1cm라서 어느 정도 크기일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작은 정사각형의 면적에 물이 가득 찬 1ℓ 플라스틱 페트병이 하나 올라가 있는 정도의 큰 힘을 대기압이 만들어낸다.

17세기 과학자 오토 폰 게리케가 독일의 도시 마그데부르크에서 여러 사람에게 보여준 놀라운 실험이 있다. 구리로 만든 반구를 서로 마주 보게 붙여놓고, 그 안의 공기를 모두 밖으로 빼서 안을 거의 진공으로 만들었다. 양쪽에서 무려 15마리의 말이 두 반구를 반대 방향으로 떼어놓으려고 해도 반구가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실험이다. 맞붙은 금속 반구 둘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기 중의 대기 압력으로 밖에서 안을 향하는 큰 힘을 모든 방향에서 받고 있는데, 여러 마리 말의 큰 힘으로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한다는 실험이다. ‘비움’은 정말 힘이 세다.

마음의 무게

물리학뿐 아니다. 우리 삶에서도 비움은 정말 힘이 세다.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려면, 마음을 비워야 한다.

요즘은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도 산책을 자주 했다. 마감이 다가오는 원고가 있거나 물리학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을 때, 논문 초록의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일 때, 근무하는 대학교 바로 옆 작은 저수지 둘레를 한두 바퀴 걷고는 했다.

천천히 산책하는 그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뚝딱 원고 한 편의 구성이 끝나고, 번쩍 새로운 연구 방향을 떠올릴 수 있을 때가 많았다.

산책으로 마음을 가볍게 하면 그 빈 곳에 무언가가 새로이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방금 적은 이 문장도 재밌다. 우리는 질량이 없는데도 마음이 무겁다고, 혹은 마음이 가볍다고 말한다. 물리학자의 눈에 마음은 부피가 없지만, 만약 마음에도 부피가 있다면 가벼운 마음은 바로 밀도가 작은 마음이다. 작은 밀도의 마음은 아래가 아닌 위로 오르고, 무거운 마음은 바닥에 머문다. 물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가 안을 비워 위로 떠오르듯이, 사람의 마음도 비워야 위로 솟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