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테마 에세이

우리는 왜 함께 가야 할까


글_김범준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함께’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혼자서는 함께 할 수 없다. 함께 하려면 적어도 두 명이 필요하다. 여럿이 함께 걸을 수도 있지만, 함께 걷는 것을 뜻하는 동행(同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이 눈앞에 먼저 떠오른다. 어깨를 나란히 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사이좋게 걸어가는 모습,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길을 함께 가는 모습.

물리학에서 발견한 동행, 상호작용

물리학에 상호작용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입자 하나는 상호작용하지 못한다. 최소한 두 입자가 필요하다. 전체를 구성하는 입자가 무엇인지 잘 알아도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모르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짝지은 둘 사이의 상호작용이 전체의 모습을 만든다. 자전축이 기울어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돈다. 지구의 공전이 빚어내는 계절 변화도 결국 해와 지구, 둘 사이 상호작용의 결과다. 지구 내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우리가 아무리 속속들이 알아도, 겨울이 지나 봄이 되는 이유를 지구 하나로는 설명할 수 없다. 계절이 바뀌어 피는 한 송이 봄꽃도, 결국 지구와 태양이 함께 힘써 만든 합작품이다. 함께 상호작용해 동행하는 모든 것이 모여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세상이 된다.

물리학에서 두 입자의 상호작용은 작용-반작용의 법칙을 따른다. 지구가 태양을 잡아당기는 중력은 태양이 지구를 잡아당기는 중력과 크기가 정확히 같다. 상호작용의 크기가 같아도 무거운 쪽이 덜 움직인다. 지구 주위를 태양이 돌지 않고,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도는 이유다. 상호작용에 반응해 주로 움직이는 것은 가벼운 쪽이다.

동행하는 두 사람 사이 상호작용에도 어쩌면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성립할 수도 있겠다. 내가 그에게, 그가 나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이 같은 크기여도 더 큰 변화가 생기는 쪽이 있다. 내가 그에게 배워 더 많이 변하는 이유는, 나의 동행이 가진 삶의 무게와 생각의 깊이 때문이다.

앞선 이와 따라가는 이

봄이 다가오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겨울을 난 철새가 무리를 지어 북쪽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자주 본다. 영어 알파벳 V자의 뾰족한 한 가운데 새가 선두에서 무리를 이끈다. 새들이 굳이 이런 대형으로 날아가는 이유가 있다. 앞선 새의 날갯짓이 만든 공기의 흐름을 이용하면 뒤따라 나는 새는 더 적은 에너지로 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팀에 세 명씩 무리를 지어 함께 달리며 두 팀이 경쟁하는 스케이트 팀 추월 종목의 모습도 떠오른다. 다른 선수를 이끄는 맨 앞 선수는 더 큰 공기 저항을 받아 더 힘들다. 선두 바로 뒤, 딱 붙어 달리는 선수는 공기 저항을 덜 받아 체력 소모가 적다.

팀 추월 스케이트나 무리 지어 나는 철새나, 앞선 이는 앞선 이의 몫이 있다. 앞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을 몸으로 막아내 따라오는 이를 돕는다. 새나 스케이트 선수나, 지친 앞선 이를 위해 다음엔 다른 이가 앞으로 나선다. 누군가 앞서면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지만, 아무도 앞서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우리 삶의 동행에도 앞선 이는 뒤에 오는 사람을 끌어준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우리 모두가 부르는 슬픈 가락의 노래에도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라는 구절이 있다. 오르막길에서 밧줄 양 끝을 각각 잡고 앞에서 뒷사람을 끌어당겨 보라. 앞 사람 속도가 줄어든다. 하지만, “나도 힘들어”하며 끌어주지 않으면, 다음 고개를 넘을 때 후회할 수 있다. 힘든 나를 뒤에서 밀어줄 이가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행하는 둘이 역할을 바꿀 때도 많다. 내가 앞에서 끌어준 누군가는 자신의 뒤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이어서 끌어줄 수도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 함께 걸어가려면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 되어

함께 걷는 이가 둘에서 셋이 되면, 셋 안에는 반드시 내가 본받을 사람이 있다. 바로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 必有我師焉)’이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절반, 나보다 못한 사람이 절반이라 가정해 간단한 확률 계산을 해보자.

셋이 함께 걷는 상황에서 나를 뺀 둘 모두가 나보다 못한 사람이어서 본받을 것이 없을 확률을 구해볼 수 있다. 한 사람이 나보다 못할 확률이 1/2이니, 둘 모두 나보다 못할 확률은 1/4이다. 둘 중 적어도 한 명이 나보다 나을 확률은 1에서 둘 모두 나보다 못할 확률을 빼면 되니, 그 값은 3/4 혹은 75%다. 그런데, 왜 공자는 확률 100%일 때 쓰는 단어인 ‘반드시’라고 했을까? “셋이 함께 걸을 때, 그 중 내 스승으로 삼을 만한 이가 발견될 확률은 75%다”가 더 맞는 말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자님 말씀처럼, 내가 본받을 만한 사람이 100%의 확률로 반드시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이유가 있다. 어떤 이는 나보다 책을 더 많이 읽었을 수도, 이야기를 더 논리적으로 할 수도, 대인관계가 나보다 더 원만할 수도 있다. 우리 삶에서 가능한 모든 다양한 측면을 떠올리면, 심지어 “이인(二人)행 필유아사언”도 맞다. 둘이 동행해도 상대는 반드시 내 스승이다. 나를 끌어줄 사람, 그리고 나를 밀어줄 사람이다. 내가 끌고 밀어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