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채선애(트렌드모니터 엠브레인 부서장)
‘대용량·다구성’으로 가성비를 극대화했던 홈쇼핑이 소분 판매 대열에 나섰다. ‘고비용·다보장’이 대세였던 보험업계도 짧은 기간 저렴한 비용으로 필요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소액단기보험’ 상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음식점이나 주점에서는 모든 주류의 ‘잔술’ 판매가 허용됐고, 이제는 웹툰도 ‘1시간권’ 시간제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지금 소비자들의 일상은 사소한 먹거리부터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소량화, 소분화’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근본적 이유는 고물가와 경제 불황 때문이다. 소비자들에게 ‘가격’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목돈이 나가거나 지속적인 비용이 요구되는 소비 항목은 지출 목록에서 빠르게 배제되고 있다. 무지출 챌린지나 짠테크, 거지방 같은 절약형 라이프스타일이 등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소량화, 소분화를 주도하는 원인을 가격에서만 찾기엔 뭔가 부족하다. 앞서 언급한 몇몇 사례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이 흐름이 유독, 시간의 효율적 사용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소분 소비를 선택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시성비(시간 대비 성능) 때문이다.
소량화, 소분화 흐름이 있기 전 대중 소비자들의 일상에는 콘텐츠를 소비함에 있어서도 ‘빨리감기’ 배속 시청을 선택하고, 특정 노래의 속도를 빠르게 올린 스페드업(Sped up) 버전의 음악을 선호하며, 영화나 드라마를 요약본 시청으로 해결하고, 웨이팅을 피하기 위해 예약앱 서비스를 이용하는 시성비 태도가 뚜렷했다.
목적은 단 하나. 시간은 허투루 소비하지 않고 ‘더 많은’, ‘더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제 소비자들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면 경험의 폭과 영역, 범주 등 전반적인 스펙트럼이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경제적 여유가 조금 없더라도 시간을 잘 관리하면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고,
그것이 곧 나의 가치를 올리고 의미가 되는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되는 시대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시간 대비 효율을 높이는 니즈가 강력해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최대·최다의 경험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소비자들은 이같은 경험을 지향할 가능성이 크다. 다양한 경험은 계층 이동성이 약화되고 정체된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경쟁력을 높이는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대·최다의 경험은 결국 완료나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잡한 선택지는 주관적 만족감을 저하시키는 선택의 역설을 발생시킨다. 이 선택의 역설을 피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작업은 무엇일까. 바로 선택의 폭을 좁히는 일이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무작정 다양한 경험보다 경험의 내용과 본질을 보다 정교하게 압축하고, 선택의 폭을 좁히고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하나의 태도가 좀 더 뾰족해졌다. 바로 진정성을 담보한 직접적인 경험을 선택하려 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를 배우는 과정을 떠올려보자. 누구나 자전거 타기는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전거는 직접 타봐야 익힐 수 있는 기술이다. 시간 대비 효율(시성비)을 따져가며 자전거 타기 요약본을 읽거나, 자전거 타는 방법 영상물을 보면서는 결코 그 기술을 익힐 수도, 터득할 수도 없다. 직접 해봐야 스킬이나 전문성도 높아지고, 그 경험이 온전한 내 것이 될 수 있다. 간접적인 경험은 직접 경험을 대체하기 어렵다. 따라서 지금까지 시성비를 추구하며 이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상황을 만끽했겠지만, 이제부터 소비자들은 적절한 즐거움을 느끼고, 가치 있는 경험이 가능하며, 진정성을 체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경험의 내용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더욱 확고해질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최선 안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작지만 그 무언가를 경험의 대상으로 취하는 것이다. 바로, 시성비의 나비효과다.
이러한 흐름이 견고해지면 하나의 전체 경험보다 일부라도 독립적으로 경험해보려는 챕터별 경험의 니즈가 높아질 수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 2030세대를 중심으로 달리기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퇴근 후 여럿이 모여 도심속을 달리는 러닝크루 열풍이 불면서 러닝족은 더욱 더 늘어나는 추세다. 덩달아 러닝화 시장도
급성장했고, 마라톤에 대한 폭발적 관심으로까지 이어졌다. 정식 마라톤뿐만 아니라 배달대행 기업 우아한형제들이 주최한 5km 이색 마라톤 장보기 오픈런 역시 1분만에 티켓이 매진될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전문가들은 시간과 비용 부담이 덜하면서도 건강한 운동이라는 이미지가 러닝 열풍을 일으킨 주요 이유라고
분석했다. 맞는 내용이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다른 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마라톤 대회의 코스 구성이 42.195km에 규정되지 않고 하프부터 시작해 10km, 5km, 4km, 3km, 2km까지 코스가 다양해지고 축소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대중소비자들은 완전한 형태로 최고 목표에 도달하기보다
소소하지만 경험의 내용을 잘게 구분해 직접 체험에서 오는 즐거움, 성취감 등의 가치를 느끼려 노력중이다. 목표를 낮춰 잡아 작은 성공을 반복하면서 진짜 목표에 다가설 수 있도록 단계적 성장을 계획하는 것이다. 경험의 단위는 축소되고 있지만, 그 경험에서 얻고자 하는 가치의 크기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처럼 소비자들은 폭넓은 경험에서 심층적인 경험으로 선택의 중심축을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제품을 소비하는 방식에서부터 일상 생활에서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생활 방식이 소량화, 소형화, 세분화 되고 있다. 이러한 소분라이프 트렌드가 가속화되면 소비자들은 제품과 서비스의 본질적 가치와 품질 등 기본과 근본,
오리지널에 점점 더 집중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개별 요소들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고, 기본적인 요소의 질이 전체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물리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심리적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보다 뚜렷해지고, 평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부분, 너무 작아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살피고 발견하려는 노력이 많아질 수 있다. 디테일(Detail)의 중요성을 파악하게 된다는 뜻이다. 원래 디테일의 사전적 정의는 작고 덜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때론 이 ‘작고 덜 중요한’이란 수식어 때문에 디테일이 ‘대단하지 않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감성에 따라 움직이는 소비자들은 이 디테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사소한 디테일 하나에 감동하고 만족하며, 팬덤이 되는 수준에까지 이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앞으로 작은 단위로 나누어지는 소비 패턴의 변화를 넘어 근본과 기본, 디테일의 중요성을 따지는 태도는 더욱 견고해질 수 있고, 금전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 또한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소분소비가 지향하는 소분라이프는, 한 마디로 진정한 ‘찐’을 찾는 근본과 기본 그리고 오리지널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