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수빈 사진. 엄태헌
원두를 분쇄하고, 물을 끓이고, 서버와 종이 필터를 적신 뒤 원두에 물을 살짝 부어 뜸을 들인다. 이후 가느다란 물줄기를 천천히 내리면 비로소 한 잔의 향긋한 커피가 완성된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 피로를 희석하기 위한 용도로 ‘수혈’했던 아메리카노는 잠시 잊고 오늘만큼은 느림의 미학이라 불리는 핸드드립 커피를 즐겨 보기 위해 한전KPS 본사 및 인재개발원 직원 4명이 모였다.
다양한 커피 머신과 핸드드립 도구들이 즐비한 나주혁신도시의 바리스타 학원. 차분한 공기가 감도는 공간에 인재개발원 교육기획실 윤희원 주임, 전략기획처 김창모 직원, 경영혁신처 황덕은 주임, 품질경영처 문태현 주임이
들어서자 어느새 왁자한 분위기가 되었다. 자연스레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마치 오래전부터 친했던 사이인 듯한데, 웬걸 동기인 윤희원 주임과 문태현 주임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면이란다. 알고 보니 네 사람 모두 성격
유형 검사인 MBTI에서도 외향형 성격을 뜻하는 ‘E’ 성향으로, 팀 내에서도 분위기 메이커를 도맡고 있는 일명 ‘핵인싸*’로 통하고 있었다. “같이 커피클래스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처를 받아서 어제 미리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상의 끝에 촬영에 쓸 선글라스도 소품으로 각자 챙겨왔는데, 클래스 마치고 단체 사진 찍을 때 쓰면 재밌을 것 같아요!”
평소 커피 취향은 라떼를 즐겨 마시는 김창모 직원을 제외하고 모두 한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파였다.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커피 맛을 음미하기 보다는 루틴처럼
마시거나, 졸음을 쫓기 위해 마신다는 점. 그리고 에스프레소 기반의 커피를 마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로스팅한 원두 가루를 필터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 천천히 커피를 내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핸드드립은
짧은 시간 동안 강한 압력을 가해 맛이 강렬한 에스프레소 추출과 다르게 커피 본연의 향과 맛을 깔끔하고 부드럽게 즐길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회사에서는 도구를 모두 갖추기가 번거롭기 때문에 더 간편하게 핸드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드립백’ 추출과 그라인더, 드리퍼, 종이 필터, 서버 등 본격적인 도구로 추출하는 두 가지 방식을 배워보기로 했다.
*사람들과 잘 어울려지내는 사람을 의미하는 ‘인사이더(Insider)’에 아주 커다랗다는 뜻의 ‘핵’을 붙인 신조어로, 무리와 잘 지내는 사람을 뜻한다.
“드립백과 핸드드립 모두 기본은 같아요. 1인 분 기준 원두양은 10g, 물은 150ml, 이걸 3분에 걸쳐서 내리는 거예요.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니까 각자 한 번씩 커피를 내려 본 뒤 맛에 어떤 차이가 있나 볼
거예요.”
첫 번째 차례는 황덕은 주임과 문태현 주임. 타이머를 맞추고 원두 위로 물을 붓자 거품이 동그랗게 솟아오르고 이내 주변으로 향긋한 내음이 퍼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차분했던 분위기도 잠시, 생각만큼 잘되지
않자 두 사람이 선생님에게 폭풍 질문을 던진다.
“여기는 커피가 가운데로 콸콸 떨어지는데요?” “물이 가득 찰 때까지 부어요?” “여기 빵(거품)이 생겼어요! 근데 시간이 1분밖에 안 남았는데 어떡해요?” 다행히 처음이지만 잘했다는 선생님의 칭찬과 함께 각각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었다. 이제 맛을 볼 차례. 같은 원두지만 신기하게 커피의 맛이 다르다.
“커피는 덜 괴롭힐수록 맛있어져요. 처음에 조금씩 커피를 내린 문태현 님의 커피가 더 맛있는 이유예요. 바로 물을 붓지 않고 한 번 적시고 기다리면서 뜸을 들인 뒤 한 방울씩 떨어지게 3분에 걸쳐 물을 붓는 거예요.
30초까지 물을 붓고 기다리는 게 1차 추출, 2분 20초까지 물을 조금씩 부어 2차 추출, 2분 21초부터 다시 3차 추출, 총 3번에 나누어서 조금씩 내리는 거죠.”
설명을 들은 김창모 직원과 윤희원 주임이 시간분배에 신경 쓰며 커피를 내렸다. 이번에도 역시 맛이 각각 다르다. 같은 원두를 사용하더라도 분쇄도와 추출 시간, 물 온도, 물줄기를 어떻게 조절하는지에 따라 미세한 맛의
차이가 생기는 것. 그게 바로 핸드드립이 가진 섬세한 매력임을 조금씩 알아가는 네 사람이었다.
원리도 익혔으니 드리퍼를 이용해 더 많은 양의 커피를 추출해 보기로 했다. 드립백은 정해진 용량에 물을 수직으로 낙하시키기 때문에 초보자도 별다른 스킬 없이 어느 정도 맛을 보장할 수 있지만, 서버와 드리퍼를 이용한
핸드드립은 필터의 입구가 크고 넓어 조금 더 훈련이 필요하다. “공식은 같아요. 3분 동안 3번에 걸쳐서 천천히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거예요.” 선생님의 설명에 따라 원두에 물을 붓기 시작하는 네 사람. 하지만 성격에
따라 내리는 모습도 천차만별이다. 카페 아르바이트 경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커피를 가장 많이 마신다는 김창모 직원은 끝까지 일정하게 물을 부어 추출 후에도 원두 찌꺼기의 모양이 가장 예뻤다. 반면 드립백
수업에서 칭찬을 받았던 문태현 주임은 마지막에 물을 많이 부어버린 탓에 원두 찌꺼기가 울퉁불퉁한 모양새였다. “카페에서 바리스타 어깨 너머로 구경할 땐 쉬워 보였는데 직접 해 보니 어렵네요. 사소한 부분에서 커피의
맛이 달라진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요.”
핸드드립 클래스로 또 다른 커피의 매력과 바쁠수록 잔잔한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네 사람. 특히 윤희원 주임은 이날을 계기로 국내 브루잉 커피 장인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고 싶다는 소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끝으로 완성한 드립백은 각각 소중한 사람들과 나눌 계획이라며 정성스레 포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활발한 성향 덕에 각 팀에 에너지를 주는 존재로 톡톡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이들이지만 때로는
지치고 힘든 순간도 분명 있을 터. 그때마다 오늘처럼 지긋이 커피 한 잔을 내리는 여유를 통해 소소하지만 평화로운 마음속 쉼표를 얻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