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곽한나 참고도서. 요시모리 마사루 <독일 100년 기업 이야기>,송치영 <백년가업>
기업은 ‘사회적 유기체’라 불린다.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하며 성장하고 진화한다. 갑자기 불어닥친 위기나 시련을 이기지 못하면 밀려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강한 기업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기업이 강하다는 말도 나온다. 장수기업이 많은 독일이나 일본과 달리, 기업의 평균 수명이 30년이라는 우리나라에서 100년을 넘긴 기업은 단 13곳뿐이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온 국내외 장수기업의 원동력을 들여다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역사를 지닌 기업은 어디일까. 올해로 128주년을 맞은 두산그룹이다. 두산그룹의 출발점은 1896년 서울 종로에 문을 연 ‘박승진 상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산그룹 고(故) 박두병 초대 회장이 1946년 선친이 운영한 박승진 상점의 이름을 ‘두산상회’로 바꾸면서 현대사를 이어왔다.
오랜 역사를 가능케 한 두산의 원동력은 ‘변화’로 꼽힌다. 1952년 OB맥주를 설립하며 성장한 두산상회는 1960년대에 이르러 건설과 식음료, 기계 등으로 사업 변화를 꾀했고, 1970년대부터는 선진 외국 기업과 손을 잡으며 기술을 고도화했다. 1995년 창업 100주년을 앞둔 두산은 30여 개 계열사로 무거워진 몸을 주력 4개 사로 재편했다. 맥주와 콜라 등 알짜 기업을 매각해 현금 흐름을 바꾸고, 중공업과 기계 중심 기업으로 과감하게 업종을 변환한 것이다. 이는 1997년 금융위기(IMF)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두산그룹에 이은 장수기업 동화약품(127주년)은 1987년 창립한 국내 최초의 제약사다. 활명수를 개발해 양약의 시대를 열었다. 동화약품의 역사는 ‘민족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활명수 판매금으로 독립자금을 조달하고, 1919년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 간 비밀 연락망인 ‘서울연통부’를 운영했다. 초대 사장인 민강 사장은 국내외 정보와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행정 책임자로도 알려져 있다. 동화약품은 오늘날까지 수익금의 일부를 물 부족 국가의 식수 정화 사업과 위생교육에 사용하는 글로벌 사회공헌활동으로 민족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설립 125주년을 맞는 우리은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식회사다. ‘금융을 원활하게 해 경제 발전에 기여하라’는 고종황제 뜻에 따라 황실자금과 민족자본으로 설립했다. 초대 은행장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다. 우리은행은 일제강점기 금융침탈에 저항하고, 1907년부터 시작된 국채보상운동과 독립운동 자금을 관리하며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계획 시기에 강력한 국민 저축운동을 이끌며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밑거름을 만들었다. 1997년 금융위기를 돌파한 우리은행의 해법은 ‘혁신’과 ‘글로벌’ 전략이었다. 금융위기 당시 부실자산을 정리하고, 해외 선진 금융기법을 도입한 전산시스템과 신용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재구축했다. 신성장 동력을 해외에서 찾고자 미국, 홍콩,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 법인을 설립해 글로벌 진출의 핵심 거점을 확보했다. 현재까지도 수출 기업을 지원하는 역할과 동시에 해외 진출에 심혈을 기울이며 유기적인 성장 전략을 추진 중이다.
올해 100주년을 맞아 장수기업 반열에 오른 주인공은 하이트진로와 삼양그룹이다. 하이트진로는 ‘통합’, 삼양그룹은 ‘확장’을 그 원동력으로 삼았다. 1924년 진천양조상회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소주의 대명사 진로를 2011년 하이트맥주가 인수하면서 대한민국 최대 주류기업인 하이트진로가 공식 출범했다.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응변창신(변화에 한발 앞서 대응하고 주도적으로 길을 새롭게 개척한다)’으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소주의 세계화’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삼양그룹의 모태는 1924년 설립한 ‘삼수사’다. 농장경영에서 출발해 과거 설탕을 만드는 회사로 가장 유명했지만, 소재, 화학, 바이오 사업 등 끊임없는 변화와 확장을 통해 성장했다. 2011년 삼양사 법인을 지주회사 삼양홀딩스로 개편하면서 스페셜티 소재 해외 판로 확대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독자적인 혁신 신약 연구개발(R&D)과 글로벌 생산기지 구축으로 의약 바이오사업의 글로벌 진출을 가속화한다는 계획이다.
일본은 유독 오래된 기업이 많다. 100년 넘은 노포만 1만 5,000여 개에 이르고, 창업한 지 1,000년 이상 된 기업도 20곳 이상이다. 일본 이시카와현에 있는 전통 숙박시설인 호시료칸은 713년 개장해 오늘날까지 약 1300년 이상 지속한 기네스북 세계 최고(最古)기업으로 등록된 곳이다. 호시료칸의 제46대 점주인 호시 젠고로 대표는 “선대에 물려받은 것을 조금이나마 좋은 것으로 지속해 온 결과”라며, 그 비결로 “공원에서 입장할 때보다 돌아갈 때 더욱 깨끗하게 치우고 가는 정신”을 강조했다.
<백년가업>의 저자 송치영은 일본 ‘노포’ 기업의 공통점을 아래와 같이 꼽는다. 10년부터 100년 이상 장기적인 사업계획, 다음 세대 계승의 적극적 의지, 잘하는 것 중심의 사업 확장, 확실하고 점진적인 성장 추구, 신뢰의 장기적인 파트너십, 불황에도 견디는 재무 안전성 등이다. 특히 장인정신과 함께 기업
구성원은 물론, 그 가치를 인정해 준 고객과 함께 쌓아온 ‘신뢰’가 원동력이라고 전한다.
독일 역시 ‘가족기업 대국’으로 불린다. 200년 이상 된 장수기업이 1,500여 개가 넘는다. 대표적으로 260년 역사를 이어온 독일의 파버카스텔은 연필 하나로 역사를 시작한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문구 회사다. 독일은 경상수지 1위 국가로 중국을 제치고 수출을 통해 가장 많은 이익을 남기는 나라다.
가족자본주의와 주주자본주의가 공존하며 혁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독일 장수기업의 특징은 좋은 노동조건과 고용 유지에 관한 책임감, 고객 및 협력업체와의 장기적인 신뢰 관계, 고품질 상품과 서비스, 직원의 권한과 행동 자유도 등으로 요약된다. 메르켈 전(前) 독일 총리는 “가족기업은 독일 경제의 견인차”라고 일컬었다.
스위스 로잔 국제경영개발대학원 요아힘 슈바 교수는 “오랜 기간 영속하는 기업은 어디서 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안다. 그것은 신뢰를 가져다주고 기업의 중요한 경쟁력이 된다”고 말했다.
신뢰 경영만으로 장수기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시대 변화에 맞춰 혁신을 거듭하면서 탁월한 성과를 내야만 기업이 영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과 일본, 미국의 영속기업 중에는 제조업 경쟁력의 근간이 되는 기초소재, 화학 산업에서 수백 년 역사를 지닌 업체를 많이 볼 수 있다. 이들은 글로벌
‘혁신’기업이자, 사회적 ‘국민’ 기업으로서 존경받는다.
요시모리 마사루의 <독일 100년 기업 이야기>에는 장수기업이 사회적 명성을 얻는 원천으로 4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혁신을 기반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제품과 기술을 보유할 것. 크루푸는 최고의 품질을 지닌 철강 생산에 성공했고, 보쉬는 자동차 점화플로그 부분에서 혁신 성장의 토대를 일구었다.
둘째, 최고의 구성원 근무조건을 마련할 것. 독일은 기업 구성원 권리 보호에 관한 경영자의 위법 행위를 매우 엄격하게 처벌한다. 퇴직금 제도가 없는 대신, 연금이 최종 월급의 75% 수준에 이른다. 중대한 부정행위가 없는 한, 해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셋째, 공익재단 설립과 사회적 책임을 실천할 것. 이익 증가분을 구성원들에게 배분해 경영자의 신뢰도를 높이고, 공익재단을 설립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함으로써 기업과 제품이 사회로부터 더욱 신뢰를 얻는다.
마지막으로, 장기적 안목의 경영이다. 이는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건실한 재무 정책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된다.
100년 기업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 변화도 중요하다. 독일과 일본의 경우, 가업 승계를 단순히 ‘부의 대물림’으로만 보지 않는다. 기술과 경영, 사회적 공헌의 대물림으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돼 있다. 장수하는 기업의 이미지도 매우 긍정적이다. 기업이 국가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100년 기업이 곧 100년 경제의 중추임을 깨닫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