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묻어야 했고, 하나는 살려야 했습니다.” 고리1사업소가 지난 몇 년간 마주한 현실을 이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해체라는 새 역사를 준비하는 고리1호기, 국내 최초 계속운전이라는 목표를 가진 고리2호기. 국내 원전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두 과제가 동시에 진행되는 1,093일 동안 고리1사업소 직원들이 함께 지나온 시간을 들여다본다.
글. 이경희 사진. 엄태헌
2026년 4월 4일은 대한민국 원전 역사에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고리원자력발전소 2호기가 약 3년에 걸친 대규모 설비개선공사를 마치고 성공적으로 발전을 재개한 것이다. 이 소식이 특별했던 이유는 국내 최초 상업용 원전인 고리1호기는 해체라는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바로 옆
고리2호기는 국내 최초 계속운전이라는 또 다른 역사에 도전하면서 거둔 성과였다는 사실이다.
국내 원전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두 과제가 동시에 진행되는 동안 고리1사업소 직원들은 정지된 발전소를 다시 움직이기 위해 수많은 설비와 씨름해야 했다. 단종된 부품, 숙련 인력의 공백, 반복되는 고장과 테스트... 그럼에도 현장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4월, 고리2호기
계속운전이
현실이 되었다.
고리사업소의 이번 성과는 특정 개인의 공로로 설명하기 어렵다. 수많은 기술자와 정비 인력, 지원 부서, 협력업체가 함께 쌓아 올린 결과다. 고리1사업소가 걸어온 1,093일의 여정은 단순히 한 발전소를 다시 가동한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원전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보여준 하나의 사례였다.
김은식 소장은 처음 고리1사업소에 부임했을 때 “과연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품었다고 했다. APR1400 신형 원전을 거쳐 고리에 온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된 설비들이었다. 이미 정지된 상태였고, 상당수 부품은 단종된 지 오래였다. 일부 장비는 제조사조차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박물관에 있어야 할 설비를 운영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계속운전은 단순한 정비 작업이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사용한 설비를 다시 점검하고, 부족한 부품을 확보하고, 새로운 안전 기준을 충족시켜야 했다. 문제는 필요한 자재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정비를 시작하면 부품이 없었고, 외주 가공을 맡기면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다른 설비를 손봐야
했고, 그러는 사이 또 다른 고장이 발생했다. 작업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쌓여 갔다. “우리는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마치 은행 금고에 업무를 쌓아두는 느낌이었습니다.”
김은식 소장의 표현처럼 현장은 끝없는 숙제와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래된 도면을 뒤지고 선배들의 경험을 찾아다니며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냉동기 설비다. 필수 설비인 냉동기 3대 중 2대가 정상 가동되지 않는 상태였고, 전문 인력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고쳐 놓으면 다시 고장 나고, 원인을 찾으면 또 다른 문제가 발견됐다. 결국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반복적인 점검과 정비가 이어졌다.
“지금까지 발전소 생활을 하면서 한 설비를 가지고 2년 넘게 매달린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직원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냉동기 설비를 정상 상태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이는 계속운전의 중요한 기반이 됐다.
고리2호기 계속운전 준비 기간은 총 1,093일에 달했다. 정지된 발전소를 다시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일이다. 설비가 오래 멈춰 있으면 내부에 수분이 차고 부식이 발생한다. 전기계통과 기계계통 모두 처음부터 다시 확인해야 한다. 테스트 과정도 수없이 반복된다. 현장 직원들은 평일과
휴일의 경계 없이 일했다.
회식 중에도 호출이 오면 현장으로 복귀해야 했고, 명절 연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0일 가까운 긴 연휴가 있었던 달에도 많은 직원들이 일상처럼 출근했다. 모두의 목표가 오직 하나였기 때문에 갈 수 있는 길이었다.
현장은 끝없는 숙제와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래된 도면을 뒤지고 선배들의 경험을 찾아다니며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2026년 4월 4일은 대한민국 원전 역사에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고리원자력발전소 2호기가 약 3년에 걸친 대규모 설비개선공사를 마치고 성공적으로 발전을 재개한 것이다.
1995년에 입사, 지금까지 고리1사업소의 역사와 그 궤를 함께 해온 오해종 노조위원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정지 기간에는 파견도 못 가고 초과근무 보상도 제한적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분명 어려움이 있었죠. 그런데도 직원들은 자기 역할을 다했습니다.”
더 어려운 문제는 인력구조였다. 고리1사업소는 최근 몇 년 사이 대규모 세대교체를 겪었다. 숙련 기술자들이 퇴직하면서 현장은 젊어졌다. 전체 인력의 상당수가 MZ세대로 채워졌다. 당연히 어려움이 있었다. 고리2호기의 오래된 설비는 매뉴얼에 나오지 않는다. 신입 직원들은 공구 이름부터 배워야 했다.
설비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가 반복됐다. 하지만 그래서 현장은 오히려 최고의 교육장이 됐다. 중간 관리자와 선배 기술자들이 후배들을 현장에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 가르쳤다. 설비를 직접 분해하고 조립하며 익힌 기술은 어느새 조직의 새로운 자산이 됐다.
“작업을 하는 동안 젊은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현장의 주역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번 계속운전 과정은 발전소를 살린 사업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차세대 기술인력을 키워낸 교육 과정이기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오해종 노조위원장은 “향후 원자력 분야 인재 양성과 교육 체계가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은 경험이 후배들에게 체계적으로 전해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말로 이번 성과의 미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고리1사업소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단어는 ‘최초’다. 국내 최초 상업용 원전, 국내 최초 원전 해체, 국내 최초 계속운전. 고리에는 언제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왔다. 당연히 그만큼 부담도 크다. 계속운전 역시 단순히 한 발전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리2호기의 성공 여부는 향후 고리3·4호기와
한빛, 한울 등 다른 원전의 계속운전에도 영향을 미치는 기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은식 소장은 직원들에게 자주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되뇌였다. “우리는 원전 역사의 주인공이다. 서 있으면 땅이 되고 걸으면 길이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침내 지난 4월 4일 새벽 3시 57분 찾아왔다. 1,093일간의 준비 끝에 계통연결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순간이었다.
“다른 발전소도 많이 살려봤지만 그때는 느낌이 달랐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벅참이 있었습니다. 사업소 직원 전체가 같은 마음이었죠.”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안전사고 없이 모든 과정을 마무리했다는 점이다. 정비와 시험, 반복되는 작업 속에서도 중대 사고 없이 목표를 달성했다. 이는 특정 부서의 성과가 아니라 사업소 전체가 함께 만든 결과였다.
고리1사업소는 여전히 바쁘다. 고리1호기 해체라는 또 다른 도전이 남아 있고, 계속운전의 경험을 후속 사업에 전파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성과는 분명한 의미를 남겼다. 오래된 설비를 다시 움직인 기술력, 세대교체 속에서도 성장한 인력,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현장의 집념을 말이다. 고리2호기
계속운전은 결국 발전소 하나를 살린 이야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원전의 미래 가능성을 증명한 현장의 기록이었다.
Mini Interview
“계속운전 성공의 주인공은 직원들입니다”
고리1사업소에 와서 저는 “우리는 원전 역사의 주인공이다”라는 말을 참 많이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결과를 돌아보면 주인공은 리더가 아니라 현장에서 땀 흘린 직원들이었습니다. 자재도 부족했고 예산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비를 살려낸 직원들과 간부들에게 가장 먼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번 경험이 앞으로 이어질 계속운전 사업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은식 소장
“고생한 직원들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계속운전 승인이 확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직원들이었습니다. 휴일에도 현장에 나왔고, 명절에도 설비를 지켰습니다. 경제적인 보상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낸 직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고리1사업소는 늘 ‘최초’라는 이름과 함께 걸어왔습니다. 앞으로도 그 자부심을 이어갈 수 있도록 현장을 든든히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오해종 노조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