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며 조급함을 느끼지 않기란 쉽지 않다. 더 빨리, 더 높이 도달해야 한다고 재촉하는 세상에서 타인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보폭’을 유지하는 일은, ‘숨 가쁜 전력 질주’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2026년의 봄, <KPS STORY>가 만난 두 번째 인물은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의 원작 웹소설을 쓴 작가이자, 의사와 유튜버라는 세 개의 궤도를 동시에 달리고 있는 이낙준 작가다. 무작정 속도를 높여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대신, 흔들림 없이 지속할 수 있는 일상의 리듬을 찾아가고 있다는 이낙준 작가의 호흡법을 들여다보았다.
글. 박향아 사진. 조병우
“와~ 의사가 쓴 웹소설이라고?” 이낙준 작가의 필명 ‘한산이가’ 앞에 붙는 ‘이비인후과 전문의’라는 타이틀에는 분명 사람들을 한 번 더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가 의대에 간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수능 점수에 맞춰 갔다. ‘이비인후과’라는 전공을 고를 때도 ‘하고 싶은 것’보다 ‘절대
못하겠다는 것’부터 지웠다. 정신과는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았고, 생명을 직접 다루는 긴장감도 버거웠다. 남은 것이 이비인후과였다. 선택이라기보다 소거의 결과였다.
그런데 그게 나쁘지 않았다. ‘이것이다’라는 확신보다 ‘이건 아니다’라는 감각을 더 믿는다.
“고등학교 때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을 만큼 고득점을 받았는데도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전공’을 선택하는 사람, 진짜 대단한 거예요. 저는 그냥 점수에 맞춰 갔어요.”
자신에 대한 과장이 없으니 선택에 미련도 없다. 대신 그 선택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 완벽한 마스터플랜이 완성될 때까지 선택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일단 해보고 아니면 부족한 것을 채우거나 다음 선택을 하면 된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군의관 시절, 연일 계속되는 폭우로 갑자기 생긴 시간의 공백 속에서,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글쓰기’라는 일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제가 생활툰을 정말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거든요. 병원 안에서 병원 사람들과만 하루를 보내다 보니 병원 밖의 사람들의 일상이 궁금했고, 생활툰이 그 궁금증을 채워주었던 것 같아요. 반대로 바깥에서 병원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병원 안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는 거예요. 그럼 내가 한 번 써볼까 한 거죠.”
처음부터 잘 쓰려는 생각은 없었다. 목표는 명확했다. 빠르게 생산하고, 실패에서 배우며, 다음 작품을 조금 더 낫게 만드는 것. “어떤 일을 해볼까 생각만 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부딪혀보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저는 일단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세기에 남을 명작을 쓰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아예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의 첫 작품은 당연히 망할 거다’라고 실패를 확정 짓고 들어갔죠.”
처음부터 무리한 속도를 내며 완벽주의라는 덫에 빠지는 대신, 멈추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신만의 페이스를 찾아낸 것이다.
완벽한 질주보다
유연한 보폭으로
‘웹소설 쓰기’는 군대를 전역하고 페이닥터로 근무를 시작하면서도 계속 이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집필이었지만, 작품이 궤도에 오르면서 병원 진료와 글쓰기를 병행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24시간. 물리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환경 속에, 수면 시간이나
가족과
보내는 삶을 포기하는 대신, 일상 속 ‘시간의 빈틈’을 찾아내 리듬을 재배치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근해 진료 전 1시간 반 동안 글을 쓰고, 점심시간에는 10분 만에 도시락을 비운 뒤 남는 시간에 다시 노트북을 켰다. 그에게 주어진 하루의 자투리를 모조리 끌어모은 셈이다. 놀라운 것은 이
빡빡한
일정이 그에게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통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저는 잠 못 자며 버틴 레지던트 생활도 꽤 즐거웠어요. 열심히 배우며 하나씩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고요. 그런데 페이닥터를 시작하면서는 열심히 배운 것들을 활용하기보다는 감기 환자를 보는 일상이 반복됐고, 심적으로 조금 지치기도 했는데, 글을 쓰는 시간은 제게 오히려 스트레스를 푸는 탈출구이자
정신적인 위안이 됐죠.”
같은 글을 쓰는 작가들을 만나는 일이 설레었고,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에서 몰랐던 세계를 만났다. 굳이 우선순위를 정한 것이 아니었다. ‘글쓰기’에서 느낀 재미가 ‘일상의 틈’을 찾아 그 틈을 촘촘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었다.
유튜브 ‘닥터프렌즈’를 시작한 계기도 다르지 않다. 친한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수다를 떨던 유희의 시간이 어느덧 142만 구독자와 소통하는 창구가 되었다.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맹목적으로 달린 것이 아니라, 일의 성격을 ‘휴식’과 ‘놀이’로 치환하며 영리하게 삶의 밸런스를 조절해 온
것.
그래서 이낙준 작가는 누구보다 촘촘하게 채워가는 일상이 여전히 재미있다.
출처: JC미디어
그의 대표작 <중증외상센터: 골든 아워> 속 주인공은 환자를 위해 자기 삶을 기꺼이 갈아 넣는 초인적인 의사다. 하지만 현실의 이낙준은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일과 삶의 경계를 철저하게 지켜낸다.
지금 그의 하루는 꽤 명확하다. 오전 9시 반부터 1시까지 글을 쓴다. 점심 후 오후 2시 반까지 글쓰기를 마무리하고, 헬스 1시간. 4시 반부터 유튜브 대본을 검수하거나 다음 날 쓸 내용을 구상한다. 6시 이후는 오롯이 자신과 가족의 시간이다. 외부 스케줄은 하루에 하나가 원칙이다. 출장이
겹칠
때는 이동 시간을 집필 시간으로 쓴다. 가는 기차 안에서 원고를 쓰고, 오는 기차 안에서 책을 읽는다. 그리고 잠은 무조건 7시간 이상이다. “성질이 더러워지거든요. 잠을 못 자면(웃음)”
가끔 한계에 부딪히거나 숨이 찰 때면 집 앞 선술집에서 아내와 가벼운 안주를 곁들이며 대화를 나누고, 한강을 뛰며 마음의 먼지를 털어낸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소소한 기쁨을 단단히 쥐고 있는 것. 그것이 그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단단한 마음 근육이다.
많은 이들이 의사라는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가 웹소설과 유튜브라는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궁금해한다. 이낙준 작가는 “남들이 말하는 성공의 지표가 아닌 ‘내가 정말 재미있는가’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에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그는 새로운 일을 선택할 때 결코 배수의 진을 치지 않았다. 군의관 시절 처음 펜을 잡았을 때도, 친구들과 카메라 앞에 섰을 때도 ‘의사’라는 본업의 벽돌을 충실히 쌓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마음이 어디로 기우는지, 그 일에 대한 내 안의 열의가 얼마나
뜨거운지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무조건 일을 벌이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일단 살짝 발을 담가보고, 실패도 해보고, 그러다 내가 정말 즐겁게 몰입하고 있다는 확신이 서면 그때 무게 중심을 서서히 옮기는 ‘스위칭(Switching)’이 필요해요. 저 역시 그렇게 조금씩 보폭을 넓히며 지금의 자리를 찾았습니다.”
미래를 과하게 예측하거나 남들의 속도에 휩쓸려 전력 질주하는 대신, 오늘 내가 쌓고 있는 벽돌 하나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가장 영리한 우선순위의 법칙이다.
“매일 벽돌을 쌓아 올리지만, 이게 다 지어지고 났을 때 어떤 모양의 건축물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 안의 열의를 따라 묵묵히 걷다 보면, 언젠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삶의 풍경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조급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작은 도전부터
시작해보세요.”
성공이라는 거센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보폭을 끊임없이 탐색해 온 이낙준의 시간들. “사실 최근 ‘중증외상센터’로 인한 성과는 제 능력이라기보다, 제 속도로 걷고 있다가 우연히 아주 빠르게 달리는 버스에 올라탔던 것뿐이에요. 이제 그 버스에서 내렸으니, 다시 저만의 보폭으로 달려
나가야죠.”
완벽한 계획을 좇아 남들의 속도에 휩쓸릴 필요는 없다. 굳이 숨 가쁘게 전력 질주하지 않아도 괜찮다. 묵묵히 나만의 속도로 걸으면 된다. 단, 잠은 충분히, 인생은 즐겁게, 가끔 행운처럼 찾아오는 ‘버스’도 놓치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