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결심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누군가는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실패하지 않을 최적의 타이밍을 재느라 정작 출발도 못 하지만, 어떤 이는 운동화 끈부터 묶고 문밖으로 나선다.
서경덕 교수는 명백히 후자다.
광복절에 에펠탑 광장에 수백 명의 여행객을 결집시키고, 지하철 맞은편 승객이 읽던 뉴욕타임스에 꽂혀 세계 최고의 신문에 독도 광고를 성사시킨 사람. 32년간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각인시켜 온 그의 행보는
늘 완벽한 준비가 아닌 무모해 보이는 첫발에서 시작됐다.
2026년, 또 한 번의 출발선에 선 한전KPS 임직원들을 위해 서경덕 교수를 만났다. 망설임 없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그의 일상에서, '시작의 기술'을 찾아볼 참이다.
글. 박향아
“시작은 거창한 결심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지금 당장 현관으로 나가 신발 끈을 묶는 것. 그 찰나의 순간이 바로 시작입니다.”
서경덕 교수는 '시작'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얘기다. 머릿속에서 ‘짱구를 굴리는 건’ 시작이 아니다. 내일 하겠다고 미루는 대신 청소기를 당장 손에 쥐는 것, 침대의 유혹을 물리치고 신발 끈을 묶는 그 잠깐의 결심이 곧 시작이다. 결과는 그다음 이야기다.
서 교수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인 ‘시작’ 역시 완벽한 계획과 준비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 떠난 유럽 배낭여행. 가는 곳마다 같은 질문이 따라왔다. “너 중국인이야? 일본인이야?” 내 나라를 몰라주는 게 화가 나고 억울했다.
파리 에펠탑 광장에서 열린 8·15 광복절 만세운동은, 타국에서 느낀 아쉬움과 설움을 그저 생각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판을 벌여보자’는 마음으로 만나는 한국인들에게 행사를 알리기 시작했다. 무모해 보였던 그 ‘입소문’은 수백 명을 결집시킨 최초의 플래시몹으로 기록됐고,
그가 ‘한국홍보전문가’로 무수히 많은 시작을 하게 만든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어릴 때 고(故) 정주영 회장님의 일화를 보며 깊이 와닿았던 말이 하나 있어요. ‘야, 너 해봤냐?’라는 질문이었죠. 해보지도 않고 잘 안될 것 같다고 섣불리 포기하지 말고, 일단 판을 벌려보고 부딪혀보는 겁니다. 목표 달성 여부는 나중 문제예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면 일단 뭐든 시작하세요.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세상일이 준비한 대로만 굴러가던가요? 현장에서 마주한 예기치 못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키입니다.”
서 교수의 실행력은 2005년 뉴욕타임스 독도 광고를 성사시키는 과정에서도 빛을 발했다. 2005년,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제정했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연일 흘러나오던 때, 서 교수는 뉴욕에 머물고 있었다. 현 상황에 대한 분노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고민을 안고 탑승한 뉴욕
지하철. 서 교수는 지하철 안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던 뉴욕타임스를 보고, 직감적으로 ‘저기에 독도 광고를 싣자’고 결심했다. 세계 최고 권위지에 광고를 내면, 세계에 일본 정부의 부당함을 제대로 알릴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뉴욕타임스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무작정 찾아갔다.
물론 세계 최고의 신문사가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담당자를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어렵게 만난 뒤에도 끊임없이 신분을 의심받았다. '개인이 왜 국가 현안에 관한 광고를 내려 하느냐, 혹시 정부에서 보낸 것 아니냐.' 그 의심을 푸는 데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게다가 서 교수의 한국 포털
이메일 주소(Daum)를 영문 윈도우에서 열어보다 글자가 모두 깨져 나오는 바람에, ‘이상한 단체’로 몰리기도 했다. 또 한 달이 사라졌다. 자본도, 인맥도, 완벽한 영어 실력도 없었지만, 그는 책상에서 고민하는 대신 현장으로 달려가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그렇게 ‘우리 땅, 독도’가 실린
뉴욕타임스가 세상에 발행될 수 있었다.
“철저히 준비하고 시작하는 것도 좋죠,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이라면 한 번쯤은 무작정 찾아가서 그들의 생각을 듣고 부딪혀보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설령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도, ‘이런 부분이 부족했구나’ 깨닫고, 준비해서 다시 도전할 수 있잖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들이 터질 때, 유연하게
대처하며 해결해 나가는 힘. 그것은 일단 움직이고 부딪혀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실행의 무기입니다.”
아무리 호기롭게 시작한 일이라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뉴욕타임스 독도 광고를 시작으로, 동해 표기 바로잡기 캠페인, 세계 유명 박물관 한국어 서비스 도입, 위안부 문제 국제 광고까지, 굵직굵직한 성과 이면에는 후원자를 찾기 위해 뛰어다니고, 매일 전 세계 지도(바이두, 구글, 각국
기상청 등)의 독도/동해 표기 오류를 찾아내어 시정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의 메일을 보내는 고되고 지루한 노동이 있다. 그 지속의 힘, 꾸준함의 비결이 궁금했다.
“선배들은 저에게 노‘하우(HOW)’를 가르쳐줬지만, 저는 후배들에게 노‘후(WHO)’를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방식이 좋다고 알려주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과 함께하면 좋은지를 얘기하는 거죠. 고된 과정을 견디게 하는 것은 결국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밤늦게까지 회의하다가 먹는 순댓국 한 그릇과 소주 한 잔. 그 자리에서 나오는 새로운 아이디어. 같이 일하면서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는 즐거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를 옆에서 보며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어지는 마음.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며 쌓아가는 소소한 재미가,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무모하게 시작했던 스물두 살의 서경덕과 서른두 해를 꾸준히 지속해 온 지금의 서경덕은 분명히 달라졌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거리에서도 그를 알아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신들이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상대가 자신의 실수를 빌미로 역공을 펼칠 수도 있으니, 모든 시작에 신중함이 더해졌다. 서
교수는 그
책임감이 때로 새로운 도전을 망설이게 만들기도 한다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래서 더 의식적으로 소소한 재미를 찾으려 노력 중이다. 책임감만으로 하는 일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인들도 지치게 한다는 것을, 일 속에서 재미를 찾을 때 꾸준히 오래 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촘촘히 채워진 일정에 잠깐의 여유를 끼워 넣는 것도 그가 50대에 들어서며 터득한 방식이다. 10시에서 11시, 11시에서 12시를 촘촘하게 계획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일정 사이에 20분의 틈을 남긴다.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는 시간이 늦어지더라도 괜찮다. 하루의 ‘틈’이 모여 지속할
‘힘’이 될
테니 말이다.
그 ‘힘’을 디딤돌 삼아 재미있게 도전할 새로운 시작도 준비 중이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OTT와 전 세계 스포츠 경기 전광판 홍보,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한국을 알릴 생각에 벌써 심장이 뛴다는 서경덕 교수.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시작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으라”고 당부했다.
“매번 새해가 되면 여러 결심을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첫 시작을 너무 거창하게 세우기 때문이에요.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했다면, 스마트폰으로 운동법이나 예쁜 운동복만 검색할 게 아니라 당장 낡은 운동화라도 신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영어를 공부하겠다면 오늘 당장 서점에 가서 책을
한 권
사든 학원에 등록하든 해야죠. 목표를 세웠다면 아주 작은 행동부터 하나씩 일상으로 옮겨보세요. 그 사소한 실천들이 모여 결국 내 습관을 만들고, 삶을 바꿔나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