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한수빈 참고자료. 서울정책아카이브, 도쿄전력 외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일상에 도달하기까지 에너지는 수많은 설비와 복잡한 길을 따라 이동한다. 그 여정의 마지막 구간에는 ‘배전망’이 있다. 초창기 전봇대와 가공선에 의존하던 배전망에서 지중화·스마트미터·자동복구 기술로 대표되는 현대적 배전망까지. 전기가 흐르는 길을 넘어 안전성과 도시의 미관, 재난 대응까지 가능한 지능형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다.
세계가 ‘지중화’라는 새로운 답을 찾기 시작한 배경에는 자연재해가 있었다. 특히 일본은 지진과 태풍 같은 자연재해가 잦은 탓에 전봇대가 손상되거나 전선이 끊기며 대규모 정전 사태를 자주 겪었다. 이 때문에 전선을 지하에 묻는 지중화 정책이 안전성과 도시 미관, 재해 회복력을 높이는 핵심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도시 미관과 보행 안전을 위해 지중화를 추진하는 전력회사가 많고, 규제와 정책적 측면에서도 무전주화를 장려하고 있다. 유럽도 비슷한 흐름이다. 독일은 ‘지중 케이블 우선법(Underground Cable Priority Law)’을 도입해 신규 고전압 선로 설치 시 지중화를 우선시 하도록 했고, 영국 역시 런던 주변에 1970년대부터 고전압 전산 터널을 이용해 지중 설비를 일찍이 구축했으며 현재는 런던 도심을 가로지르는 지하 터널에 400kV 초고압 전력망을 신설하는 ‘런던 LPT 프로젝트(London Power Tunnels, LPT2)’를 진행 중이다. 한국에 지중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지상 전주 제거와 전선 지중화에 대한 공공 예산 지원이 시작되었다. 서울은 2020년~2024년 사이 전선 지중화 254km를 목표로 사업을 추진해 2024년 기준 약 62.2%의 지중화율을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덕분에 도시 미관 개선과 보행환경 조성이라는 명분 외에도 ‘전깃줄과 전주가 없는 거리’라는 관광객들의 반응이 더해지며 지중화가 기술투자를 넘어 도시 브랜드의 일부로 자리 잡고 있다.
과거 전봇대와 선로 위에 존재하던 전기는 이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지중화가 전선을 땅에 묻어 도시를 정돈시키고 재난에 강한 기반을 만드는 과정이었다면 미래의 배전망은 한층 더 정교해지며 지능화되고 있다. 스마트미터(AMI)는 가정과 건물에서 소비되는 전력량을 실시간으로 측정해 전력 사용 패턴을 파악하고, 이상 징후를 조기에 감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과거에는 정전이 발생해야만 이상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전력이 줄거나 불안정해지는 작은 흐름만으로도 사전 진단이 가능해지고 있다. 자동 복구 시스템(Feeder Automation)은 고장 구간을 스스로 찾아 고장 즉시 분리하고 전력을 우회 공급함으로써 정전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시설 유지와 관리 인력의 부담까지 덜어낸다. 이처럼 미래의 배전망은 ‘보내는 길’이 아니라 ‘조율하는 플랫폼’으로 변화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태양광, 풍력, 연료전지, ESS(에너지 저장 시스템) 같은 분산 에너지 자원이 늘어나며 전기는 시시각각 생산과 소비가 일어나는 복잡한 네트워크가 되고 있다. 배전망은 그 중심에서 전력을 분배하고 균형을 잡는 역할을 맡고, 서로 에너지를 주고 받는 전력 생태계의 허브로 자리 잡을 것이다. 나아가 AI 기반 수요 예측, *디지털 트윈 기술을 활용한 설비 관리와 실시간 탄소 배출량 모니터링까지 더해지면 전기는 도시 환경 산업의 전략적 요소가 될 가능성이 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안전하고, 더 똑똑하게 진화하고 있는 배전망. 보이지 않는 길을 통해 전기를 공급하며 여전히 우리의 일상을 지탱해 줄 것이다.
* 현실의 시스템이나 환경을 가상 세계에 똑같이 복제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으며 시뮬레이션 및 예측하는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