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진우
지난 몇 년간 많은 이들이 일과 여가를 분리하고 균형을 맞추는 ‘워라밸’에 힘써 왔다. 하지만 둘은 완벽하게 떼어 낼 수 없다. 모두 ‘내 삶’이라는 울타리 안에 속해 있기 때문. 최근 각광받고 있는 ‘워라블’은 이러한 워라밸의 아이러니를 해소하는 데 큰 힘이 된다.
2010년대 중반 혜성처럼 등장한 ‘워라밸(Work-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 트렌드는 수많은 직장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경제적 성장, 개인 존중에 대한 욕구 증가, 다양한 취미의 등장 등이 복합적으로 엮이면서, 워라밸을 실천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업무를 일상의 우선순위에 뒀던 기존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기도 했다.
워라밸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업무와 여가의 분리와 균형을 중요시한다. 그 가치관 자체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문제는 방법이 다소 기계적이라는 데 있다. 5:5, 6:4와 같이 일과 삶의 비중을 절대적 시간으로 계산해 밸런스를 맞추려는 경우가 많다. 지금껏 많이 쓰이고 있는 신조어 ‘칼퇴(정시 퇴근)’가 이를 방증한다. 일과 삶을 분리하는 방식도 과격한 면이 있다. 업무 외 시간에 회사나 직장 동료에게 연락이 오면 불같이 화부터 내거나, 퇴근 후 다음 출근 전까지 아예 전화나 문자를 차단하는 사람이 많다.
물론 퇴근 후 업무 연락은 지양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업무 담당자로서 매우 급박하고 중요한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사무실을 나섰다고 해서 아예 연락을 안 받는다면 자기 자신, 직장 동료, 회사 모두에게 피해가 간다.
워라밸을 사수하려다가 오히려 여가를 망치는 일도 때때로 일어난다. 예를 들어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워라밸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칼퇴를 감행한다면, 과연 퇴근 후의 삶을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집안이 평안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리듯, 일이 잘 풀려야 여가가 평안해지는 법이다.
워라밸이 오히려 삶의 균형을 무너트리기도 한다. 지나치게 여가에 집착한 나머지 회사 생활과 업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거나, 일에 대한 허무감을 느끼는 사례가 왕왕 발생하는 것.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기에, 여가가 풍족해지려면 경제활동이 뒷받침돼야 한다. 따라서 업무를 소홀히 하다 보면 여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018년 당시 아마존 CEO를 맡고 있던 제프 베이조스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한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때문에 워라밸을 반대하는 기업인으로 오해받기도 했는데, 발언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는 기계적 워라밸 대신 일과 인생이 조화를 이루는 ‘워라블(Work-Life Blending)’을 추구해야 삶 전체가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강조했다.
사실 일과 여가를 분리한 뒤 둘을 저울에 올려놓고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발상은 모순적인 측면이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그렇듯, 일과 여가도 인생의 연속선상에 있다. 요컨대 둘은 사실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 관계다.
현실이 이런데도 MZ세대 사이에서 워라밸이 유행했던 배경에는, 자신과 가정에 소홀한 채 업무에만 매달리는 사람을 소위 ‘인재’라며 추켜세웠던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강한 반감이 존재한다. MZ세대가 개개인의 가치관과 개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짙다는 점도 워라밸의 확산을 부채질했다.
그런데 워라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자, MZ세대도 생각을 바꾸고 있다. 일과 삶을 억지로 분리하려고 노력하면서 심신에 스트레스를 줄 게 아니라, 둘을 자연스럽고도 적절하게 섞어서 삶 전체의 조화를 이루자는 워라블의 가치가 조명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던 2020년대 초에는 워라블을 ‘덕업일치(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취미와 직업이 일치하는 상태)’와 연결 지어 설명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덕업일치와 워라블은 다른 개념이다. 덕업일치는 취미와 일을 하나로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반면, 워라블은 일과 삶을 대립적인 구도로 바라보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인생을 달려 나가게 만드는 업무와 여가라는 두 바퀴가 잘 구른다면, 때때로 서로의 범위를 다소 침범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마음가짐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워라블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직장인이다. 일을 잘 처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칼퇴를 감행한 뒤 여가 시간 내내 불편한 마음을 느꼈다면, 여가에만 몰입하다 보니 점점 일하기 싫어지고 업무 역량이 뒤처지는 자신을 자각했다면, 이미 워라블 실천의 첫걸음을 뗀 셈이다.
다음 스텝은 ‘일과 삶이 긴밀하게 연동돼 있음을 깨닫고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정 기간 내에 반드시 해내야 하는 과업이 주어졌다면, 여가 시간의 일부와 삶의 집중력을 업무에 투입한다. 반대로 업무 진행에 여유가 있고 제 몫을 했다고 판단되면 칼퇴, 연차 등을 통해 여가의 비중을 높인다. 이 정도의 변동성을 인정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면 어딜 가든 “나는 워라블 실천 중”라고 자신 있게 말해도 무방하다. 일과 여가의 교집합을 찾고 자기계발에 힘쓰는 것도 훌륭한 워라블 실천법이다. 업무 내용 중 흥미로운 지점이 찾았을 때 이를 그냥 지나치지 말고 여가 시간에 살펴본다면, 업무 역량 향상뿐만 아니라 일하면서도 여가를 즐길 때 이상의 기쁨을 느끼는 일종의 덕업일치도 이룰 수 있다.
워라블형 조직 문화 확산을 위한 회사 차원의 노력도 중요하다. 업무에 지장이 없다는 가정하에,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워케이션(Worcation)’이나 집에서 일하는 재택근무를 활성화한다면 구성원들의 워라블 실천 의지가 높아질 수 있다. 워라블을 감안한 복지제도 추진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예컨대 특정 분야에 관심 있는 동료들끼리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시간과 비용을 지원하는 ‘런치 앤 런(Lunch & Learn)’, 출장 중 여가를 보내거나 출장 전후로 개인 휴가 일정을 붙여서 쓸 수 있도록 하는 ‘블레저(Bleasure)’ 등을 시행함으로써 구성원들이 자연스럽게 워라블에 녹아들 수 있도록 독려하는 식이다.
일과 여가를 조화롭게 병행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라블의 가치를 되새기고 둘을 순조롭게 병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워라블은 우리에게 더욱 알차고 의미 있는 삶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