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강진우
프로게이머로 나선 60대, 야구 관람에 푹 빠진 여성, 저속노화를 실천하는 청년. 이렇듯 기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소비 스타일을 구축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세상은 이들을 옴니보어(Omnivore)라고 부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소비 패턴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청소년과 대학생은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열심히 노는 데 힘을 쏟았다. 취업 후에는 결혼, 육아, 내 집 마련 등에 경제력을 집중했으며, 장년층으로 접어들면서 노후 준비와 건강 관리에 매진했다. 세부적인 내용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서로 달랐지만, 넓게 보면 연령, 성별, 사회적 통념 등에 따라 엇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려 나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인생 공식’이 빠르게 힘을 잃으면서 개개인의 개성과 취향에 의한 소비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같은 세대라도 소비 행태가 천차만별로 세분화되고 있으며, 서로 다른 세대가 한데 모여 특정 취향에 열광하는 장면이 종종 연출된다. ‘장년층 프로게이머’, ‘여성 풋살 모임’, ‘화장하는 남성’, ‘50대 육아휴직자’와 같이 과거에는 다소 파격적이라고 받아들여졌을 법한 조합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기존의 잣대로 소비 성향을 예견·분석하기 어려워진 ‘초개인화 소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옴니보어(Omnivore)는 이처럼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소비 스타일을 구축·실천하는 소비자를 일컫는 신조어다. 이들은 인구학적으로 분류된 집단적 특성 대신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소비의 기준으로 삼는다. 만약 일부 소비자가 이런 행태를 보였다면 이들을 ‘유난 떠는 부류’로 취급할 수도 있었겠지만, 옴니보어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주류 소비 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
옴니보어적 소비 행태는 일상생활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노화 예방 관련 소비가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늘었다. 노화를 늦추는 생활 습관을 강조하는 ‘저속노화’ 트렌드가 주목받으면서 혈당 관리, 수면, 영양학적 균형 등에 도움을 주는 제품의 수요가 높아진 것이다. 영양제를 꾸준히 구매·복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는데, 한 경제 매체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8.3%가 30세 이전부터 영양제를 챙기기 시작했다고 밝혔으며, 20대 이전부터 먹기 시작했다는 응답자도 11%에 달했다.
장난감, 만화, 캐릭터 등에 열광하고 관련 소비에 돈을 아끼지 않는 이른바 ‘키덜트(Kidult)’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서울의 한 놀이공원이 유명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 개봉에 맞춰 관련 이벤트를 대대적으로 마련하자 수많은 성인 팬이 이곳을 찾았으며, 관련 굿즈도 2주 만에 완판됐다. 영·유아를 타깃으로 한 분홍색 비버 캐릭터 ‘루피’가 어느 누리꾼의 재해석을 통해 얄밉도록 맹랑한 면을 지닌 ‘잔망루피’로 재탄생한 뒤 성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자 부산의 한 호텔은 ‘잔망루피’로 꾸민 테마 객실을 선보였는데, 개장 후 투숙률이 85%에 달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스포츠 분야에서도 옴니보어의 활약상이 두드러진다. 보통 스포츠 관람객 하면 남성을 떠올리기 쉽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2024년 상반기 프로야구 티켓 구매자 중 여성의 비율은 54.4%로 남성을 앞질렀다. 요가나 필라테스를 배우는 남성, 풋살과 클라이밍을 즐기는 여성이 함께 늘어나고 있으며, 단백질 보충제를 섭취하며 운동을 즐기는 여성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패션·뷰티 업계의 지각변동도 심상치 않다. 여성성의 상징이었던 스커트, 꽃무늬 소품 등을 착용하고 피부 관리와 각종 미용 시술 등에 공을 들이는 남성들이 부쩍 늘었다. 반대로 여성들은 축구 유니폼을 일상복으로 입고 다니는 ‘블록코어(Blokecore)’, 품이 넓어 활동하기 편한 남성용 사이즈의 옷에 열광하는 중이다. 패션 브랜드와 편집숍은 옴니보어적 소비의 확산세를 반영해 성별 구분 없는 패션 아이템과 매장을 발 빠르게 늘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식생활의 경계도 갈수록 희미해져 간다. 디저트와 커피, 파인다이닝을 즐기는 남성, 다양한 주류와 맛있는 안주를 좋아하는 여성, 탕후루를 후식으로 먹는 장년층, 때마다 보양식을 챙겨 먹는 청년층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이렇듯 옴니보어는 거의 모든 소비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기존에 통용돼 온 전형적인 소비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다. 이 같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건강을 위해 영양제를 챙겨 먹는 20대
요가·필라테스를 배우는 남성
축구 유니폼(블록코어)을 입은 여성
탕후루를 먹는 장년층
우리는 개개인의 선택권이 점점 넓어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학업, 결혼, 출산 등 누구나 으레 해 왔던 과업이 선택의 문제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각 과정에 투입돼야 할 재정을 한결 유연하게, 각자가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심지어 생계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돈 버는 일도 다채로운 형태로 분화된 지 오래다. 전방위적인 선택권의 확장과 이에 따른 라이프스타일의 다변화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소비 성향을 ‘남을 만족시키는 소비’에서 ‘내가 만족하는 소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SNS와 같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실시간 교류의 장이 활짝 열렸다는 점도 옴니보어의 득세에 한몫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는 비슷하게 살아가는 이웃들과 교류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소비의 모양과 지향점도 서로 닮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앞서 언급한 ‘인생 공식’을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누구든 SNS 앱만 열면 전 세계인들의 수많은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나의 개성과 취향을 발견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욕망을 중시하는 옴니보어 소비가 주목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언제나 그랬듯 소비에 정답은 없다. 소비력의 크고 작음과 만족도의 높고 낮음, 소비 지속성의 길고 짧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한 뒤 소비에 나서야 한다. 나의 개성과 취향을 최우선으로 하는 소비로 만족도를 끌어올리되, 필요 이상의 소비와 불필요한 지출은 적절하게 막아야 한다. 물론 때로는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돈을 쓸 수도 있지만, 옴니보어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소비 행태를 이어 나간다면 머지않아 ‘텅장(텅 빈 통장)’과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개성과 취향, 만족과 절제 사이에서의 지속적인 저울질과 합리적인 결정. 이것이 바로 옴니보어에 현명함을 덧붙이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