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향아 사진. 고인순
‘활자’가 사라진 자리를 ‘폰트(font)’가 대신하는 시대. 글쓴이의 개성이 담긴 손 글씨를 만나게 되면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손 글씨 안에는, 일관된 속도로 흐르는 반듯한 폰트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글쓴이의 개성과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일 터. 분당사업소 직원 4명이 캘리그래피 달력 만들기에 도전했다. 2024년 한 해 동안 채워나갈 다양한 빛깔의 꿈들이, 이들의 손끝에서 예쁘게 피어났다.
책상마다 놓인 컴퓨터, 그 안에서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똑같은 폰트로 기록되는 문서. 분당사업소 4명의 직원이 익숙한 사무실을 벗어나 ‘개성 넘치는 손 글씨’로 가득한 공간에 들어섰다. 2024년 한 해의 시작과 함께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열두 달.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겠다는 각오와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나만의 손 글씨가 담긴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다.
“총무팀과 기술팀이 2022년부터 한 공간에서 근무하게 되었거든요.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다양한 동아리 활동, 문화 체험 등 업무뿐만 아니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면서 한 팀이 되어가고 있어요. 지난해 남한산성 등반 후 함께 마신 막걸리랑 파전의 맛은 정말 최고였어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더 즐거웠던
기억이죠.”
지난 2년간 함께 만든 추억들을 곱씹어보는 이봄이 직원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같은 추억을 공유한 직원들 역시 당시의 기억이 떠올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오늘, 네 명의 직원들은 두고두고 꺼내 볼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 차례다.
테이블 위에 놓인 캘리그래피용 붓펜과 하얀 종이. “손에 힘을 주는 강도를 통해 선의 굵기를 잘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강사님의 설명에 따라 선 긋기 연습이 시작됐다. 마음과는 달리 삐뚤빼뚤 그어지는 선을 보고 있자니, 처음 한글을 배웠던 까마득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공책 한 바닥을 채워야 하는데,
꾀가 나서 몰래 공책을 숨겼던 기억도 겹쳐졌다. 그렇게 즐거운 ‘글자 연습’ 시간이 시작됐다.
선 긋기 연습이 마무리되고, 이제 본격적으로 ‘글씨’를 써볼 차례다. 강사님의 시범에 따라 열심히 단어를 써보지만, 덜덜 떨리는 손으로 써 내려간 글씨는 삐뚤빼뚤한 것이 엉망이다.
“요즘은 손 글씨를 쓸 일이 거의 없는 데다가 볼펜도 아닌 붓펜으로 쓰려니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강사님이 ‘쓱쓱’ 쓰실 때는 쉬워 보였는데, 제가 워낙 악필이라 그런가.”
김명석 대리가 말꼬리를 흐리자 강사님이 걱정하지 말라며 응원을 해준다.
“캘리그래피에서는 개성이 제일 중요해요. 반듯반듯 예쁜 글씨를 쓰고 싶으면 컴퓨터 폰트를 사용하면 되죠. 글씨에는 글쓴이의 성격, 마음이 고스란히 담기거든요. 나만의 개성이 담긴 글씨가 제일 매력적이랍니다.”
강사님의 응원에 힘입어 저마다의 글씨로 빈 종이를 채워나가는 직원들. 손에 힘이 더해지면 굵어지고 살포시 힘을 덜어내면 가늘어지는 글씨를 보고 있자니, 긴장감은 사라지고 더 예쁜 나만의 글씨를 완성하고 싶은 욕심이 더해졌다. 동글동글 부드럽게 이어지는 곡선과 날렵하게 그어진 직선의 조화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글자에
묻어나는 나만의 개성을 발견하는 재미도 새롭고 신기하다.
글씨 연습은 이제 끝, 이제 1월부터 12월까지 날짜가 빼곡히 기록된 열두 장의 종이에 해당 달에 어울리는 문장을 써 내려갈 시간이다.
묵묵히 글씨 연습에 매진하던 박은아 대리가 달력의 빈 곳에 ‘힘들면 조금 쉬어가도 괜찮아’라는 문장을 정성껏 쓰기 시작했다.
“올해가 입사 15년 차가 되는 해거든요. 아무것도 몰랐던 신입 시절을 지나 이제는 팀에서 선배의 위치에 서게 됐는데요. 그 시간 동안 함께해준 동료 선후배님들, 그리고 묵묵히 응원해준 가족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열심히, 꾸준히 달려와 준 저 자신에게도 고맙고요. (웃음) 그래서 올해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잠시 쉬어가도 좋을 것 같아요.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해서요.”
이봄이 직원의 6월 달력에는 딸 정원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이 담긴 ‘정원, SUNNY DAY’라는 문장이, 김명석 대리의 12월 달력에는 ‘당신의 인생의 봄날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문장이 기록됐다.
“올해는 따야 할 자격증이 여러 개 있거든요. 제게 맡겨진 업무를 더 잘 해내는 데 필요한 자격증인 만큼, 열심히 노력해야죠. 그렇게 치열하게 보낸 하루하루가 모여서 12월이 됐을 때, 자신에게 ‘지금이 내 인생의 봄날’이라고 얘기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분당사업소의 막내, 하선재 직원은 자신의 글씨로 채워진 열두 장의 달력을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보이는 침대 옆 테이블에 놓기로 했다. “거창한 목표나 계획은 없지만, 비어있는 달력을 빼곡하게 채울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보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우리 꽃길만 걸어요’라는 문장을 정성껏 쓴 하선재
직원. 매일 아침 손 글씨가 적힌 달력을 보며 시작하는 하루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채워질 것이 분명하다.
각자의 바람과 진심이 담긴 말들을 자신만의 글씨로 옮겨 적으면서, 오랜만에 글씨 쓰는 즐거움을 맛본 네 명의 직원들. 개성 가득한 글씨로 채워나간 달력 위에 행복한 기억들이 빼곡히 기록되길 바라본다.